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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바른경제동인회의 방향성은 설립된 이후 내놓은 첫 작품인 ‘기업인 신생활 운동 선언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선언문은 천민자본주의적 악습으로 가득찬 한국사회와 경영풍토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우리는 너무 오랜 기간 잘못된 가치관에 깊숙이 젖어있어 이윤추구만이 기업의 목적인양 생각했으며, 남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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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9.03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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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바처럼 우리 회사는 종업원지주제를 넘어서 ‘성과공유제’를 실천해 가고 있다. 성과공유제란 이익이 날 경우 종업원들에게도 똑같이 배당을 하는 제도를 말한다. 주주들에게 배당을 하듯이 종업원들에게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회사 주식을 갖고 있는 직원이라면 주주로서도 배당을 받고 종업원으로서도 이익이 난 부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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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8.2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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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 째로 우리 회사에는 비밀 장부가 없고, 회계장부 조작도 없다. 과거에는 회사들마다 적자가 나는 것을 감추거나 세금을 조금 낼 목적으로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일들이 꽤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회사도 1994년도 결산까지는 예외라고 할 수가 없다. 이익이 난 것을 적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적자가 났을 경우는 은행이 무서워서 조금 이익이 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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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8.2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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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잘 알다시피, 우리 회사는 회사와 경영을 대물림 하지 않고 그야말로 전문경영인제도를 도입해 회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람들, 심지어 나의 친구들까지도 그런 형태로 경영을 해서는 회사 경영이 엉망이 될 것이라고 충고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전문경영인제도 뿐만 아니라 종업원지주제를 확산시키고, 더 나아가 지금은 &l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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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8.1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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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서도 밝혔지만 우리 회사는 다섯가지가 없는 회사이다. 사시(社示)도 없고, 인맥도 없고, 리베이트도 없으며, 밀수도 없고, 회계장부 조작도 없는 5무(無) 회사라는 말이다.우리 회사는 사시는커녕 그럴듯한 표어 같은 것도 붙여놓지도 않았다. “도대체 형식적인 표어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어떤 지표가 있다면 그것을 그냥 실천하면 되는 것이지&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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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8.0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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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회사는 작아서 앞으로 더 키워야 합니다. 회사에 전력투구하기 위해서는 단체장 같은 것을 맡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가 본 ‘오사카 상인’이라는 책 얘기를 꺼냈다. 오사카 상인들은 상공회의소 소장과 같은 자기들의 대표를 뽑을 때는 감투욕이 세거나 제일 못난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다. 상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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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1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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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는 90년대 초반부터 증권거래소 상장을 목표로 끈질기게 도전했으나 2000년대 중반까지는 그 꿈을 실현 시킬 수가 없었다. 2007년 10월에 비로소 ㈜KSS해운의 이름으로 상장이 돼 오늘날 상장된 해운회사로 명성을 날리고 있지만, 상장되기 이전의 과정은 정말 눈물겨운 시련의 연속이었다.1991년 당시에 우리 회사는 1987년부터 5년간 연속 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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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7.2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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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을 오가는 정기항로가 개설된 것은 해운역사에 남을 큰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마침 당시 북경에서는 남북한간에 쌀 회담이 성사가 됐기 때문에 남북한간의 직항로 개설은 주목을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또 하나는 남북한 당국이 이런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기를 꺼려하는 일면이 있었기 때문에 홍보를 전혀 하지 않은 까닭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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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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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회 생일여태까지 생일을 그냥 그럭저럭 지냈으나 83회 생일은 그렇질 않다. 왜일까? 자꾸만 기력이 빠진다. 회한이 밀려온다. 마지막이란 예감이 든다.고향 집 생각, 조부모님의 인자한 모습,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특히 가족을 위해 온갖 희생을 다 하신 어머님, 세상을 모두 떠나버린 형님, 누님들의 얼굴이 떠오른다.미국에 사는 첫째와 둘째 친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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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7.16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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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정적인 걸림돌은 남북 양측이 당국의 승인을 받는 문제였다. 사실 북한측 대표들은 모두 정부의 관료들이었지만, 민간인 명함을 들고 민간인 신분으로 회담에 임하고 있었다. 이 회담의 경우는 조선항만무역회사라는 이름으로 합의서에 서명을 하도록 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북한간의 계약은 법적으로는 순수 민간기업간의 계약인 셈이다.따라서 민간업체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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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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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부터 나는 한쪽으로는 남북 직항로 개설에 몰두하게 됐다. 내가 남북을 연결해 중국 길림성으로 컨테이너화물을 수송하는 컨테이너 운송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냉동선 운항회사인 일우해운을 인수했다가 큰 낭패를 당한 일을 반추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수요공급만을 놓고 봤을 때는 분명 성공할 것 같았던 냉동선 운항 사업이 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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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7.0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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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LNG선 운항사업에 직접 참가하지 못하게 된 것을 매우 섭섭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정부가 입안했던 국적선에 의한 LNG 수송 계획은 수립 단계부터 석유화학 관련 운송선사인 ‘한국특수선’의 자료와 자문을 많이 참조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막상 이 계획이 세워지고 운영선사를 뽑는 단계에 이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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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6.2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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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미러클호에 대한 에피소드는 몇 개가 더 있다. 사실은 이 가스미러클호 건조에는 예의 유요해운이 관련이 돼 있었다. 미쓰비시측이 제시한 선가가 너무 비싼 것이 마음에 걸린 나는 유요해운측에 공동건조를 제안했고, 언제나처럼 유요해운이 여기에 응해, 두 회사가 공동건조에 들어가게 됐었다.우리는 백방으로 용선주를 찾은 끝에 1992년 4월, 그리스의 나프토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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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6.2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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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계약은 도긴리스의 고토 사장의 결단이 없었다면 하마터면 무산될 뻔 했다. 도긴리스가 자금지원에 대한 계획을 모회사인 동경은행에 올렸지만 계약 당일까지도 승인이 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모회사의 승인도 없는 상태에서 고토 사장이 책임을 지겠다며 업무 담당자인 다카시마 이사에게 “홍콩 가서 계약서에 사인하고 오라&r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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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6.13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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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가 오늘과 같이 튼튼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불황 때 미래를 내다보고 대형 가스선 시장에 뛰어들었던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스선 운항의 경험을 쌓게 해 준 고마운 선박이 초대형 가스선인 가스포임호이다. 우리는 이 배를 1988년 2월에 도입해 1995년 7월에 매각을 했는데, 이 배의 도입 과정에는 많은 에피소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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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6.0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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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를 휩쓸던 해운불황은 1987년을 고비로 서서히 물러가더니 1989년부터는 다시 성장세로 돌아섰다. 석유화학분야는 한국과 중국 등 신흥국들이 석유화학 시설을 계속 확장하면서 순풍을 맞이했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지방의 경제성장도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이런 가운데 우리 회사도 매출이 꾸준히 증가하고 보유선박도 점차 신형선, 대형선으로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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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5.3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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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돌이켜 보면 역시 바나나 시장의 특성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시장에서 기선을 잡아야겠다는 생각만 앞선 나머지 바나나 수입 물량을 확보하는 데만 신경을 쓴 것이 잘못이었다. 시장이라는 것은 냉정하다. 충분한 연구와 준비 없이 의욕만 앞서서 뛰어든다면 반드시 혹독한 수업료를 내도록 요구하는 법이다.바나나 수송 이후 냉동선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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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5.2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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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려했던 대로 일우해운에서 인수한 5척의 냉동운반선이 골치 덩어리였다. 인수하고 보니 이 냉동선들은 3500~5000톤의 소형선박들이었는데 원양항로에 뛰기에는 엔진 성능이 너무 좋지 않았다.소형선박이라도 냉동선인 만큼 바닷고기 등을 싣기 위해서는 아주 먼 바다를 가야하는데, 엔진이 약하다보니 고장이 잘 나고, 그에 따라 수리비가 많이 나오는 것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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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5.1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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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의 역사를 보면 고난의 연속이었다. 동해조선 문제가 끝나서 안정을 찾는가 싶었는데 오일쇼크가 찾아왔고 이어진 극심한 해운불황 속에서 회사의 존속여부가 안개에 쌓이는 불안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1978년 연말에 찾아온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해 세계경제가 크게 휘청거리더니 1980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그 후로도 1984년까지는 불황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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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5.0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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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에 선박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 회사에서 도입했던 선박들에 대한 얘기를 더 했으면 한다. 우리 회사가 80년대 초중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가장 큰 힘이 됐던 선박은 뭐니 뭐니 해도 가스글로리아호이다. 우리 회사 출신들은 이 선박을 오늘날까지 우리 회사가 있게 한 버팀목이자 성장의 1등 공신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가스글로리아호는 주로 냉동 암모니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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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9.05.08 1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