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벗이여!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 벗이 절절히 그립다.

우리가 언제부터 벗이었던가? 대학에 갓 입학하고서 우리 둘이 찍은 사진 한 장 있었다. 고향도 다르고 고교동창도 아닌데 왜 둘이서 사진을 찍었는지 모른다. 모두 유니폼을 입어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 사람 같아 분간이 안 될 때였다.

3학년이 되어서야 사진 속의 인물이 ‘우리 둘’이란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서로 관심을 가졌다. 우연일까? 인연일까?

졸업하고 룸펜시절에 부산 창선동 뒷골목 선술집에서 막걸리로 마음을 달랬다. 문인들이 인생을 논하던 선술집을 마도로스 후보생들이 점령해 바다를 논했다.

벗은 바다로 떠나고 나는 육지에 머물렀다. 가는 길이 달라 1년에 겨우 한번 만날까 말까였다. 서울서는 무교동 대폿집에서, 부산서는 제2송도 바닷가 포장마차에서였다. 벗은 바다의 낭만을 이야기하며 흘러간 유행가를 구수하게 불렀다. 나도 노래를 부르며 내 주변 환경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우정은 숙성되어갔다.

오슬로에서 해운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도쿄에 근무하는 벗을 만났다. 1976년 3월이었다. 2박 3일을 꼬박 함께했다. 일본 사무라이와 노르웨이 바이킹 후손들이 세계 해운을 이끄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언제쯤 일본을 극복하고 노르웨이처럼 복지국가가 되느냐고 말했다.

벗이 한국으로 돌아와 제네바에서 개최된 ILO의 선원근로환경위원회에 참가했다. 승선경험과 유창한 영어로 한국 입장을 설명하는 민간외교를 했다. 나는 벗으로부터 들은 ILO동향을 선원정책에 반영했다.

벗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형제를 잃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뜻밖에 시애틀에서 만났다.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했다. 베링해와 태평양을 갈라놓은 알류산열도에서 바라본 태고연한 정밀(靜謐)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했다. 고국의 일가친척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도 곁들어 말했다. 좀 더 좋은 세상을 찾아 이민을 갔으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는가보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2011년 여름에 미국에 갔다. 필라델피아에서 지내다 귀국길에 우리는 뉴욕에서 만났다. 맨해튼 5번가와 센트럴파크에서 회포를 풀었다. 9‧11테러로 날아 가버린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순직 소방관들의 사진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아 아쉽게 헤어졌다. 귀국하여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문학에도 소질이 있어 낭만이 풍겨나는 수필을 보내왔다. 글들을 정리해 출판하라고 권했다. 이러다 이메일이 끊어지면서 소식이 점점 멀어져갔다.

2년 후에 미국에 갔으나 만나질 못했다.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했다. 내가 전화해서는 통화가 안 되고 벗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친구들의 안부와 미국언론에 비친 한국의 위기사황들을 걱정하며 통화가 길어졌다. 친구와의 대화로 외로움을 삭히려는 듯 했다.

떠나면서 못내 아쉬워 공항에서 전화를 했으나 통화가 안 됐다. 귀국하고서도 수차례 전화를 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건강이 더 나빠져서일까?

『벗이여!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만나서 손이라도 한번 붙잡고 헤어졌어야 했는데. 이렇게 후회가 막급할 줄이야.
사진 한 장으로 우리의 우정이 싹튼 지 50년을 훌쩍 넘겼구먼. 우정이 요란하지 않고 묵묵했었지.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솟아나는 옹달샘처럼 신선했었는데. 이제는 오도 가도 못하니 못 다한 이야기들을 언제 어디에서 나눌꼬!』

이 가을에 멀어져간 벗이 이 편지를 읽지를 못한다 해도 나는 바람에 실어 보내련다. ‘친구란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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