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상선 김문호 사장

▲ 한일상선 김문호 사장
들판의 황금물결이 흙빛으로 걷히고 텃밭의 김장거리들이 무서리에 결을 삭이며 앙당그릴 때면, 하늘빛이 유난히도 맑았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처마 끝을 우러르면 부시도록 푸르른 하늘에 선연한 꽃 등불. 마당가 감나무의 까마득한 우듬지에 스물 남은 선홍빛 홍시들이 깊이 모를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한껏 고왔다.
까치밥이라 했다. 산야가 눈에 묻히는 겨우내 까치들의 양식이랬다. 가을걷이를 하면서도 이듬 봄의 보릿고개를 예감하던 시절로서는 파격이었다. 까치가 반가운 소식의 전령사라는 전통 관념에의 풍습이었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꿩이며 산비둘기, 참새까지도 식용으로 긴요하던 세태로서는 지극히 편파적인 후대였다.

아직은 목질이 무른 꼭대기의 열매까지 따려다가는 혹여 낙상이라도 있을까 저어하는 배려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들판이나 계곡의 감나무에는 까치밥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입하면 이도 저도 석연찮은 명분이었다.

추수가 끝나면서부터 어르신네의 심회가 조급했다. 강 너머 마을로 새살림나간 막내네 수확이 내년의 봄 나기에나 가당할까 궁금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관을 정제하고 나서야 할 길을 하릴없이 다녀올 수도 없었다.

그러던 하루, 읍내의 혼사를 다녀오는 길에 막내네 마을을 지나는 참이었다. 잔기침을 앞세우며 사립을 들어서는 그에게 아들내외의 인사가 곡진했지만, 그의 눈길은 마당가의 볏짚더미를 더듬었다. 그러고는 짐짓 뒷간 길을 차리면서 뒤란의 서속(黍粟)이며 수숫대, 매밀 짚 더미까지 찬찬히 살피는 것이었다.

아들의 안내로 아랫목에 좌정하면서 되짚어 봐도, 고만한 짚가리의 소출로는 보릿가을까지가 빠듯할 것 같았다. 주안(酒案) 차리기에 여념이 없는 며느리와 어느새 마을에서 달려와 절을 하고 꿇어앉은 손자 놈들 앞에서 가슴만 먹먹할 뿐, 달리 이를 말도 없었다. 그런 한 순간, 문틈으로 얼핏 내다보이는 까치밥의 모습에 마음이 한결 느긋해지는 것이었다. ‘그래, 이만한 여유는 된단 말이지?’

아버지의 내방을 예견한 아들의 궁리였다. 짚단더미를 아무리 부풀려 쌓아 봐도 워낙 모자라는 가을걷이였다. 이를 고심하던 아들의 비보(裨補)가 바로 까치밥이었다. 그러나 어르신이 자식의 배려를 못 짚을 리 없었다. ‘오냐, 니 속을 내가 아느니, 상심일랑 말거라. 어느 해의 보릿고개가 다르더냐만, 그래도 산 입에 거미줄 친 일이야 없었제. 아무렴, 나와 니 형들이 지척에 같이 있거늘.’

아들 역시 아버지의 묵언을 지나 칠 리 없는 일. 도포자락으로 동구 밖을 휘저으며 멀어져가는 당신의 뒷모습에 마음의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올해도 소자의 불효가 막급입니다. 이 가을 더욱 쇠잔하신 아버님, 부디 강녕하소서.’

너나 없는 궁핍을 서로가 보듬으면서, 불편할지언정 불행하지는 않았던 시절의, 서럽도록 짙게 타는 쪽빛 창공에 선홍빛 고운 까치밥이었다.

바로 그 시절의 삽화 한 토막.

안동의 선비가 상주의 친구네로 길을 나섰다. 지난 가을, 안동의 서원추향(書院秋享)에서 만났던 친구의 초청이 각별했다. 봄에는 딸년의 혼사가 있으니 달포를 짐작하고 다녀가라던 당부였다. 거기에 지난 가을 흉작에 따른 보릿고개가 가팔랐다. 절기가 소만을 갓 지났건만 부엌살림은 이미 비척거리는 것 같았다. 조반석죽(朝飯夕粥)이야 연례의 행사지만, 안채에서는 그나마 거르는 저녁이 잦은 눈치였다. 눈에 띄게 푸석한 손자 놈들의 조석문안 받기가 사람의 노릇 아니었다.

큰 입 하나를 덜면 작은 입 두셋이야 풀칠하겠거니 하고 나선, 굽이굽이 낙동강 이백여 리 길이었다. 강둑의 이팝나무 꽃이야 고봉쌀밥만큼 탐스럽건만, 논밭의 보리이삭은 푸른빛을 벗을 기미조차 없었다. 등땀 배는 윤사월 뙤약볕에 낮 소쩍새의 공허한 목청만이 사흘 도보의 길동무였다.

염량은 처처동(炎凉處處同)이요, 장단은 가가동(長短家家同)이라 했던가. 버선발로 댓돌을 뛰어내리며 손을 잡던 상주의 친구네에서도 보릿고개의 맹위는 진배없었다. 이곳에서도 저녁은 희멀건 시래기죽이었다. 그것도 안채에서는 숟가락으로 빈 그릇을 긁으면서 먹는 시늉만을 하는 낌새가 역력했다.

자규의 울음소리와 함께 삼경을 뒤척이며 곱씹어 봐도 자신의 이번 행차가 가당찮았다. 그건 바로 제 새끼 살리자고 남의 자식 죽이는 몰염치(殺人子以活己子甚不可)였다. 남의 둥지에 제 알을 낳는다는 자규 같은 미물이나 할 짓이지, 글줄이나 한다는 선비의 처사가 아니었다. 날이 새면 당장에라도 돌아감만 못하다(不如歸)는 궁리였지만 그 또한 도리는 아니어서, 진퇴양난 불면의 밤이 진땀으로 젖었다.

사흘을 근근 지내고 나서 떠날 뜻을 전하자, 주인이 펄쩍뛰었다. 둘째딸의 혼사가 열흘 남짓이니 잔치라도 보고 가라면서 막아섰다. 그러고는 친구의 심중을 짐작하는 듯, 밀양의 진사 사돈댁 곡식바리가 오늘내일 당도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가을의 흉년을 잘 아는 큰딸의 시가에서 이번 잔치의 소요 일체를 자청하고 올려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확실치도 않은 예정을 두고 몰염치를 거듭할 수는 없는 일. 말을 잊은 채, 서로 움켜잡은 손을 놓지 못 하는 두 사람의 눈가로 이슬이 맺혔다.

부지런히 걸었건만 나루터에 이르자, 해는 이미 중천을 넘어서고 있었다. 두어 움큼의 강물로 입을 헹구는 양, 허기를 채우면서 바라보니 배가 한 척 들어오고 있었다. 곡식 섬이며 궤짝들을 실은 소와 나귀들이 여러 필이었다. 짚이는 바가 있어서 행선을 물었더니 바로 짐작대로였다.

발길을 돌린 그가 다시 친구네의 대문을 들어서자, 주인과 아들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듯, 마당을 뛰어나오면서 반가이 맞아들였다. 그러고는 어느새 장만했는지 번듯한 주안상을 사랑채로 올리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허연 고봉 밥상을 마주하면서 주인 선비가 말했다.
“이 사람, 정말 고마우이. 그냥 갔더라면 내 천추의 한을 도대체 어쩔 뻔했나.”
그러자 손님 선비가 받았다.
“내가 정녕 고마우이. 공연한 발길로 자네 가슴만 찢어 놓고 갈 뻔했잖은가.”

이틀을 유한 손님이 떠나려 하자, 이번에는 주인도 잡지 않았다. ‘그러시게, 딸년의 혼사가 무에 대수이랴. 그쪽인들 이 시절이 어디 가겠는가.’ 그러면서 소두 쌀섬은 좋아 보이는 나귀짐바리에 건어물 등짐의 경마잡이까지 딸려 보내는 것이었다.

다시 나루터로 나오면서, 몸에 밴 갈 짓자 걸음걸이가 새털처럼 가벼웠다. 그간 포음에 포식을 하면서도 자식 손자 놈들 생각에 불편했던 심중을 헤아려 주는 친구가 진정 고마웠다. 가을의 서원향사(書院享祀)에 맞추어 그를 집으로 초대한 가슴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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