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김종길

春園의 흙

난생 처음 읽은 소설이 춘원(春園) 이광수의《흙》이다.

그때가 아마도 초등학교 6학년으로 기억된다. 소설을 좋아했던 누나가 읽으라 했다. 작가가 누구인지 모르고 주인공 허숭에게 흠뻑 빠졌다. 야학(夜學)을 하며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을 하는 변호사 허숭은 나의 우상이 됐다.

시골 상놈 허숭이 서울 양반 무남독녀와 결혼했다. 사치와 허영, 부정(不貞)으로 얼룩진 아내가 기차에 투신해 다리가 잘렸다. 허숭은 부인을 용서하고 살여울에서 농촌계몽운동을 계속했다. 나는 허숭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최근, 춘원의 막내딸이 내한하여 가족사를 털어놓았다. 그는 고교생 때 도미하여 분자생화학을 전공한 여든 살의 노교수다.

춘원과 허영숙은 일본유학 때 만났다. 춘원은 1919년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하다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부호의 딸 허영숙은 집안금고를 털어 돈을 챙겨 철길 수만리를 멀다않고 춘원을 찾아 나섰다. 상해에서 산부인과를 개원하고 춘원과 살림을 차렸다.

총독부 앞잡이 허영숙이 춘원을 귀국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임시정부가 허영숙 체포령을 내렸다. 허영숙은 ‘분해서 유서를 남기고 양자강에 빠져죽으려 했으나 강물이 더러워 투신을 못했다’고 했다. 코믹하고 위트가 넘친다.

도산 안창호는 허영숙은 조선으로 돌아가고 춘원은 미국으로 가라고 권했다. 도산의 권고를 받아들었다면 춘원의 인생은 햇빛찬란했을까?

결국 1921년 춘원은 허영숙과 함께 귀국했다. 첫 번째 현실타협이 ‘민족개조론’이다. 나태하고 의타인 민족성을 개조해야 독립을 향유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청년들이 칼을 들고 몰려와 ‘춘원 나오라’고 외쳤다. 춘원은 청년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설득이 됐음인지 순순히 돌아갔다.

춘원의 결정적인 친일은 ‘수양동우회’사건이었다. 이 단체는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의 전위조직으로 교육과 계몽과 사회운동을 했다. 일제가 이 단체에 대해 대대적인 검속을 했다. 춘원은 6개월 옥고를 치르고 천황의 신민으로 살겠다며 창씨개명을 했다. 조선인 청년들에게 지원병에 자원하라는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광복 후, 춘원은 친일매국노로 몰려 반민특위에 의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전 광복회장 김우전은 ‘교토에서 춘원의 학병지원 강연을 직접 들었는데 친일이 아니라 민족의식 고취의 강연으로 느꼈다’고 했다.

급기야 춘원은 6‧25전쟁 때 납북되어 지병인 폐결핵으로 1950년 10월 25일 58세로 운명했다. 세상경륜을 터득할 인생황금기에 애석하게도.

춘원은 허영숙에게 의지해 살았다. 신장과 허파를 하나씩 잘라내고 생사의 고비마다 허영숙이 곁에서 지켰다.

《아내의 설교》란 춘원의 시가 있다. 화자(話者)는 허영숙이다.

/당신은 악인, 나도 악인/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악인이라 인정하는데, 당신은 선인인 척해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나는 손이 다 닳도록 당신을 위해 살았는데 당신은 날 위해 무얼 했소/ 그러니 나를 이해라도 해주는 남편이 돼 주소서/

춘원의 사망을 확인하고 미국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허영숙은 “당신의 생각이 너무 높아서 돌아가신 뒤에야 위대함을 알았소. 함께 살 때 잘 못해주어 미안하오. 하늘에서 만나면 착한 부인이 되겠소”라고 후회했다. 버스 떠난 뒤 손 흔들어봐야…

성격이 매몰차 춘원이 많은 구박을 받았다. 현실적인 허영숙의 눈에는 춘원이 위선으로 보일 수밖에.

나는 춘원이 북한에서 탈출했었다고 가정해본다. 조선의 망국, 일제의 폭압, 해방정국의 혼란, 세계의 전쟁터가 되었던 6‧25 등등. 그가 몸소 겪었던 굴절의 격동기를 천재적인 상상력과 필치로 그렸더라면 조국에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안겨주었을 걸.

나는 춘원을 추모하는 마음으로《흙》을 다시 읽는다.

주재소 소장이 “애써 고학을 해 변호사가 되어 무슨 까닭으로 이 시골구석에 묻혔느냐 말이야?”라고 다그쳤다. 허숭은 “내 고향 살여울에서 글 모르는 사람에게 글을 가르치고 조합을 만들어 생산 판매 소비도 합리화시켜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라 대답했다.

하지만 춘원의 이상은 냉혹한 현실에 산산이 부서졌다. 춘원은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고아였다.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아 일본유학까지 했다. 춘원은 육당 최남선과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당대 조선의 3대 천재였다.

《흙》에는 춘원의 숭고한 민족애가 절절히 스며있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