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이발사의 지혜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에 갔다.

경찰서가 가까워 위생 점검을 자주해서인지 청결했다. 이발사가 이발기를 들면 아버지가 “애 머리에 버짐 옮기지 않도록 소독 잘하시게”란 부탁에 “염려 마십시오”라 했다. 먹고살기가 어려워 영양실조와 위생불결로 아이들 머리에 버짐이 번지던 일제강점기였다.

앞 벽면과 옆 벽면이 거울로 꽉 메워졌다. 이발관 내의 모든 것과 길을 걷는 사람들도 거울에 들어왔다. 그것들을 보려고 머리를 돌리면 이발사가 두 손으로 머리를 살포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하얀 얼굴에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사가 병원 의사처럼 보였다. 그 이발사의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젊을 때, 스트레스가 쌓이면 이발사에게 내 몸을 내맡겼다. 머리깎기, 손톱손질, 면도를 하는 동안 오수를 즐겼다. 주말에 이발소가 쉼터가 됐다. 그러다 퇴폐이발소가 성행하면서 목욕탕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발사가 머리를 깎아주면 손수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족한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대중목욕탕이 세 곳이다. 시설은 고만고만하다. 그 중 하나를 택했다. 지하라서 햇빛이 들지 않는 것이 흠이지만 종업원들이 부지런해 청결하다. 하루걸러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씻는 그 목욕탕이 쉼터다. 그들 중 이발사가 눈에 띈다. 언제나 이발을 하려는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린다. 다른 목욕탕 이발사는 파리를 날리는데도…

그날, 내 순서가 네 번째였다. 바쁘지 않아 기다렸다. 차례가 되었다. 이발사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가 이발했던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들이 몇이냐고 물었다. 이발사가 말문을 열었다. “오누인데 공부를 시킬 만큼 시켰습니다. 며느리가 영어교사인데 애가 없어 직장을 그만두게 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아 애가 들어서지 않는가 하여... 격주로 자식들과 밥을 먹습니다. 제가 밥값을 치러 자식들에게 부담을 안 줍니다. 꼭 외식을 합니다. 설거지가 귀찮으니까요. 저의 부부가 며느리와 사위를 깎듯이 위해주니까 아들과 딸도 처가와 시가에서 대우를 잘 받는답니다. 세상에 공짜 없지요. 주는 것만큼 받으니까요. 죽을 때 가지고 갈 것 아니니 있는 대로 다 쓰고 죽을 생각입니다. 재산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남겨두면 견물생심이라고 남매가 불목할까 봐서요”라 했다. 재치와 지혜가 넘친다.

서양에는 고대로부터 이발사의 지위가 대단했다. 이발사는 상류사회에 속했다. 부유한 시민은 가정이발사를 두었다. 이발소에서 뉴스나 의견을 교환했다. 이집트의 대저택에는 손님들을 위해 이발사를 두고서 이발서비스를 했다.

로시니의『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이태리 오페라 최고걸작이다. 백작 알마비바는 부유한 귀족 아가씨 로진을 사랑했다. 로진의 후견인 의사 바르트로는 로진의 재산이 탐나 백작과의 사랑을 방해했다. 백작이 이발사 피가로에게 도움을 청했다. 피가로는 의사와 백작 사이를 오고가며 해학과 익살로 거중조정을 했다. 원하는 대로 백작에게 사랑을, 의사에게 재산을 안겨줬다. 이발사 피가로의 지혜가 돋보인다.

불란서에서는 국왕의 수석이발사가 시종(侍從)을 겸임했다. 또한 이발사가 종기를 째고 치료를 하는 등 외과수술을 했다. 외가의사의 선구자 앙브루아즈가 생계를 위해 면도와 이발했다고 한다. 영국에는 이발사와 외과의사가 조합을 구성하여 그 구성원들에게 Master(장인)란 존칭을 붙였다. 지금도 영국에서 외가의사들의 이름 앞에 ‘Dr’대신에 ‘Mr'를 붙인다고 한다.

이처럼 이발사가 외과의사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발사가 이발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라틴어를 배워 전문지식과 교양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발기와 가위와 면도기를 잘 못 사용하면 흉기가 됨으로 엄격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했는가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발사는 사람의 신체 중 가장 중요한 머리를 만진다하여 이발사가 교양과 예의를 갖춰 지혜로워야 편안한 마음으로 머리를 맡길 수 있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