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50년 틈을 메운 이메일

이메일 한통이 한국해운신문을 통해 나에게 전달됐다.

『안녕하십니까? 50년 넘게 소식을 모르던 동창 윤희대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2008년 3월 20일 김종길씨께서 한국해운신문에 기고한 “암울했던 海運界를 되돌아보는 윤희대”란 제목입니다. 윤희대를 꼭 찾고자 합니다. 그는 저와 초, 중, 고 동창이며 해군에서도 함께 복무했습니다. 그와 연락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오니 도움을 주십시오. 이메일, 전화번호, 주소 어느 것이라도 좋습니다. 최악의 경우 사망이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구정률이며 펜실베니아에 살고 있는 재미교포입니다』

사망이라도 알려달라는 애절함이 마치 이산가족을 목마르게 찾는 것 같다. 신문에 게재된 지 7년이 되었는데 지구 반대편에서 내 글을 읽었다니! 뿌듯했다. 지구를 떠도는 내 글을 지구 어디서나 누구든지 클릭 한 번으로 볼 수 있다니! ‘地球村’이란 단어가 무색하다. ‘宇宙村’이란 단어를 쓸 미래가 올까?

나는 <영예로운 海運人들> 책을 찾았다. 거기에서 “암울했던 海運界를 되돌아보는 윤희대”를 읽었다. 내용은 이렇다.

윤희대가 인생 황금기에 해운회사를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나 한국 최대의 그 해운회사가 경영진의 불화로 회장은 투신 자살을 하고 사장은 감옥으로 갔다. 적나라하고 간결하게 기록됐다. 해운역사의 한 단면이다. 글을 쓴 보람이 있다. 그래서들 등허리에 진땀을 흘리면서 글을 쓰는가 보다.

<영예로운 海運人들>의 저자는 나다. 해운에 열정을 바쳤던 100명의 체험을 기록하면 한국해운현대사의 공식, 비공식은 물론 히든 스토리까지도 캐낼 수 있으리라는 각오로 시작했다.

그들의 삶을 직접 듣고 그들의 저서나 기록을 꼼꼼히 살펴 매주 한 편씩 신문에 연재했다. 내 체력에 무리였던지 건강에 이상이 생겨 아쉽게도 50명으로 끝냈다. 그 글들 모아 <영예로운 海運人들>란 이름을 붙여 출간했다.

그들의 열정이 오늘의 한국해운을 만들었다. 5‧16당시 10만 톤이었던 선박이 지금 4천만 톤이 됐다. 4백배다. 겨우 50년 만에. 수출입 물동량은 9억 3천만 톤이다. 무역규모는 1조 달러를 돌파했다. 해운은 세계 5위, 무역은 세계 8위이다. 남북분단으로 우리는 섬나라에 살고 있다. 하여, 생산과 소비 등 99%가 해상으로 수송된다. 해운은 대한민국 안보의 첨병이다.

구정률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50년이 지났음에도 친구를 애타게 찾다니! 우정이 안타깝도록 아름답다. 나는 즉시 구정률에게 윤희대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이메일로 알려주었다. 답장이 왔다.

『김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의 이메일을 전달해준 한국해운신문에도 감사를 표합니다. 희대의 소식을 몰라 애태우다 Google을 검색했습니다. 거기에 7년 전의 김선생님의 글을 찾아냈습니다. 우리는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다 그는 한국해양대학으로, 저는 서울대 의과대학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해군장교로 다시 만났고 저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1965년에 도미했습니다. 의사와 교수로 50여년 근무하다 2년 전에 은퇴했습니다. 그동안 다섯 번 한국에 갔습니다. 갈 때마다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 같은 변화에 놀라웠고 조국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윤희대와 구정률! 한분은 한국 해운계에, 또 한분은 미국 의료계에 열정을 바쳤다. 겉보기엔 남들이 부러워할 학벌과 사회적 지위였다. 허나, 그들 내면 깊숙한 곳에 남모르는 고민과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이익보다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았다. 이들을 두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 하는가보다.

이메일이 두 사람의 50년 틈을 메워줬다. 저녁노을에 우정의 다리가 아름답게 다시 노여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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