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

Green Christmas Card를 받았다. White 크리스마스 카드가 아니고.

적도(赤道) 너머 남반구(南半球) 파푸아 뉴기니에서 온 카드다. 지금 그곳은 우리나라와 반대로 여름이다. 하여, 녹음 울창한 성탄절에 보내온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는 슬픔과 절망을 딛고 일어선 기쁨과 희망의 소식이다.

『그리움이 설렘으로 바뀌는 성탄!

파푸아 까리타스 런닝센트(Learning Center) 어린이들이 즐겁게 준비했던 감사미사, 졸업식, 성탄 콘서트를 마치고 이제 길고도 행복한 여름방학에 들어갔습니다.

은인들이 보내주신 성탄선물을 가득 안고 달려온 산타클로스의 등장에 기쁨으로 전율하며 서로 얼싸안는 아이들, 2주간 배운 감사미사 송을 목청껏 불러 신부님을 놀라게 한 아이들, 의젓하게 졸업장을 받아 모두들 눈시울을 적시게 한 아이들, 성탄성극 대사를 모두 영어로 외워 문맹인(文盲人) 부모님들의 가슴에 벅찬 감동을 안겨준 아이들…

우리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사진에 담아 전합니다. 아이들의 행복한 미소가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선물이길 소망합니다.

새해에 평화와 사랑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파푸아 모레스비 까리타스 수녀원에서 콜만 수녀 드림』

콜만 수녀님의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가 감동적이다. 첨부된 사진에는 수녀님들의 사랑이 넘친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과 행복이 넘실거린다.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수녀님들의 사랑으로 어린이들에게는 에덴동산이 됐다. 굶주리고 헐벗고 아픈 어린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치료하고 공부시켰다. 수녀님들의 사랑이 기적을 낳았다. 그곳과 인연을 맺은 나에게 은총이다.

인연을 맺은 내력은 이렇다.

일제가 뒤로는 회유와 협박을 하면서 지원병이라고 포장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일제는 태평양을 장악하기 위해 뉴기니에 병력을 투입했다. 4천 미터 스텐레이 산맥의 정글에서 보급이 끊겨 굶어 죽고, 얼어 죽고, 풍토병으로 스러져갔다.

조선인 지원병 5천명이 전사했다. 한일협정 때 일본이 사망자 명단을 통보했으나 한국정부가 유족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한심한 작태였다. 나는 태평양전쟁유족회와 정부기록물보존소를 오고가며 형님이 1943년 1월 30일에 전사했음을 확인하고 제사를 모셨다. ‘불쌍한 형을 찾아보아라!’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말씀이 환청으로 들렸다.

2002년 4월 29일, 도쿄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적도를 넘어 다음날 새벽에 파푸아 뉴기니의 수도 포트 모레스비에 착륙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영사가 우리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이 새벽에 어떻게 댁으로?”라고 사양했으나 대낮에도 총격전이 벌어지기 때문에 호텔이 새벽에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재외공관이 있는 나라들 중에 가장 열악하다고 했다. 형님이 전사했던 60년 전 이곳은 어떠했을까 상상했다. 지금보다 훨씬 처참한 환경에서 일본인들의 학대를 받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저려왔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제대(祭臺)에 한국에서 가져간 제수를 차려놓았다. 분향과 헌작을 하고 재배했다. 그리고 추도사를 낭독했다.

『참혹한 태평양전쟁이 끝났음에도 이역만리 뉴기니 정글에 떠도는 영령들이시여! 잔학무도한 일제가 패망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에야 영령들 앞에 엎드린 저회를 용서하소서.
…중략…
원한의 눈물을 닦아드릴 날이 올 것이오니, 피맺힌 통한을 접어두시고 이제 편히 잠드소서!』

망각으로 기억에서 사라진 원혼들에게 정부를 대신해 민간인 세 사람이 위령하고 사죄했다. 위령제를 마치고 찾아간 곳이 까리타스 수녀원이었다. 지도 신부님은 말라리아를 앓고 있어 뵈옵지 못하고 수녀님들에게 원혼(冤魂)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지 벌써 열세 해가 됐다.

1월 30일이면 수녀원에서 형님을 위해 연미사를 드린다. 나는 형님의 유해가 묻혀있는 파푸아 뉴기니의 가난하고 병든 어린이들에게 정성을 보내왔다. 아름다운 청춘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원통하게 스러져간 형님영혼이 하늘에서 안식하시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콜만 수녀님의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고 또 본다. 그곳 뜨거운 여름만큼 내 가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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