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웰다잉(well dying)

▲ 耕海 김종길
김장군은 알즈하이머 병으로 시설에 입원해 있다. 장장군이 김장군을 문병하고서 그 참상을 알려주었다. 나는 아픈 마음을 담아둘 수 없어 장장군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장장군께!

김장군을 문병하고서 며칠 밤을 잠 못 이루었다는 말씀을 듣고 김장군의 가련한 모습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군. 자정이 지나도록 잠을 이룰 수 없어 기도를 드렸네. ‘하느님! 제 친구 김장군을 이제 데려 가소서. 인간존엄을 잃고 참담한 날들은 삶이 아닌 삶입니다. 탈진하여 이끌려가고 있습니다. 부인은 병수발에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라고. 나라 위해 자신을 던졌던 그가 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하늘이 원망스럽네. 다음날 아침에도 김장군을 지향해 묵주기도를 했네.

기관장회의나 방위협의회에서 김장군을 종종 만났었네. 나라위해 헌신하는 그가 돋보였었네. 고교 동기동창 모임에서도 소탈하게 어울려 우정을 돈독하게 다졌었지. 장장군도 부인이 병고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네. 무어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네』

우리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그들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지덕체(智德體)의 교육은 불굴의 정신과 체력으로 단련됐다. 졸업하고 최전방에서 또는 후방에서 가시밭길을 걸어와 그들 어깨에 별들이 빛났다.

장장군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내가 김장군의 어려운 사정을 너무 헤프게 알려드린 것 같구려. 나는 김장군과 고등학교에서 한 반이었고 군복을 입었을 때나 벗은 후에도 동고동락했네.

20년 전, 전역 후 그와 함께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하룻밤을 함께 보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네. 그땐 다리가 기둥처럼 튼튼하고 힘이 넘쳐 선두에서 이끌어 주었었지. 지금은 앙상하게 뼈만 남아있는 다리를 만져보고 원통한 마음 금할 수 없었네. 부인이 뒷바라지를 잘하신다 하지만 김장군의 안타까운 처지가 마음에 걸리는데 어찌하겠나. 김장군을 위해 기도해 주어 고맙네.

내 집사람도 말 한마디 못하고 근 4년을 누워있네. 내가 있으니 그런대로 지내지만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될지 암담할 뿐이네. 웰다잉(well dying) 의미가 날이 갈수록 절실해 지네』

장장군은 부인에 대한 고민과 고통을 한 번도 내색하지 안했다. 바위처럼 중후한 인격이다. 우리 셋은 동병상련하는 처지였다. 종교가 같아 신뢰도 두터웠고. 김장군에게 이메일을 띄웠다. 그가 받아볼 수 없을 지라도, 읽을 수 없을 지라도.

『김장군께!

그때 그 시절 우리들 인생은 찬란했었네.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작열했고 녹음은 계절의 여왕답게 찬란했었지. 그때 김장군 어깨에 별 세 개가 어쩌면 그렇게도 찬란했던지! 자랑스러웠던 그 날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녹음 울창했던 그 여름은 아쉽게 우리 곁을 떠난 지 오래되었네. 가을마저 왔다 저 멀리 떠나버렸네. 녹음은 찬 서리에 시들어 낙엽이 되어 잔디와 호수에 나뒹굴고 있네. 흐르는 세월을 누가 붙잡겠는가?

우리도 낙엽되어 차가운 대지에 뒹굴다 한 줌 부토(腐土)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것이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어쩌겠나.』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남북분단과 6‧25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했다. 가난에 허덕였다. 그러다 산업화 대열에 동참해 풍요로운 세상을 맞았다. 허나, 80여년을 부려온 몸은 시들고 막히고 녹슬었다. 불치의 병으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연명치료를 받는다. 소생할 가망이 없는데도. 품위 있고 인간답게 웰다잉 할 수 없을까? 종교적 법률적 높은 장벽은 언제쯤 건널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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