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에

▲ 耕海 김종길
북한에서 고위층이 왔다고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이 떠들썩했다. 그들은 북한의 제2인자 3인방이라 했다. 수석대표는 시골 할아버지에게 군복정장을 입혀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군총정치국장 황병서라 했다. 그의 좌우에 낯익은 당비서 최용해와 대남비서 김양건이 있었다.

그들은 북한 선수단을 격려할 목적으로 왔단다. 하면,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이 정중하게 맞으면 될 것을… 북한에서 온 귀빈이니 한 단계 높여 대북창구인 통일부장관이 맞이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도 씨근벌떡댔는지! 옛날 왕조시대에 상국의 사신을 맞이했던 광경이 연상됐다. 국격(國格)이 떨어진 것 같아 씁쓰레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는데. 3인방이 다녀가고 난 뒤 북에서 훈풍이 불어오기는커녕 오히려 칼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경우가 한두 번 아니니 그려러니 했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일간지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군복정장을 했던 황병서의 선친 황필구의 묘가 전북 고창에 있다는 기사였다. 황필구는 1916년에 태어나 익산농림과 일본 중앙대학을 나와 원산에서 검사를 지냈다. 그는 6‧25때 월북했다가 남파됐다. 1959년에 체포돼 미전향 장기수로 복역하다 1985년에 대전형무소에서 자살했단다. 북한에서 비전향 장기수의 후손을 후대한다니 황병서가 제2인자가 될 법도하다. 아직 황병서와 황필구의 관계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2000년 9월에 미전향 장기수 62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그 중에 홍문거가 있다.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진해상선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남파돼 동기동창 해양결찰대장 최호용과 접선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후배 해군 현역장교 계원성과 접선하려다가 방첩대에 검거돼 옥살이를 했다.

홍문거가 북으로 송환되기 직전 후배인 인천항 도선사 배순태를 만났다. 그는 “내가 전향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텨온 것은 북에 있는 가족들의 안위 때문이었네. 모진 고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진해상선학교에서 혹독한 훈련과 기합으로 다져진 정신력이었지. 내가 북으로 돌아가면 북도 남과 대등하게 남쪽 사람들을 돌려보내라고 할 거야. 그리고 남과 북의 동문들이 한 자리에 모이도록 주선하겠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북으로 갔다.

홍문거가 돌아간 지 15년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의 말대로라면 북한이 대등한 조치로 국군포로 송환문제쯤은 거론했을 터인데… 그는 30년 옥살이를 하는 동안 북한이 아마도 노동자 농민의 낙원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현실은 세습독제체제를 굳혀 인민들은 굶주리고 헐벗고 탄압받고 있는데도…

북한에는 항일빨치산의 후손들과 6․25때 낙동강 전선에서 전사한 후손들, 소위 빨치산 줄기, 낙동강 줄기라고 일컫는 부류는 후대를 받는다. 백두산 혈통을 정점으로 혁명투쟁 후손들의 세상이 됐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그 사실을 알고 북을 위해 일편단심으로 살았을까? 홍문거는 북으로 돌아가 북의 참담한 현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젊은 시절의 한낱 사상적 낭만임을 깨닫고 후회하고 있을까?

손오공이 하늘로 치솟아 번개처럼 대륙을 뛰어넘어 오봉산까지 날아갔다. 여기야말로 생물이 존재하지 못하는 극지라 생각했다. 여기까지 온 증거로 손오공은 오줌을 쭉 갈기고는 돌아와 부처님께 그 전후사를 고했다. 부처님은 한쪽 손을 펴 가운데 손가락의 첫 마디를 손오공에게 내밀어 지린내 냄새를 맡게 하고는 왈 ‘너는 내 손바닥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가지 못했어’라고 말했다.

시대를 역주행해 전쟁을 일으키고, 비행기와 군함을 폭파했다. 핵무기를 개발해 세상을 향해 협박을 한다. 손오공처럼 지나친 자만과 장난을 멈추지 않는다. 제아무리 뛰어봤자 부처님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이제 깨달을 때가 되었는데도 영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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