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당골래

▲ 耕海 김종길
집안에 경조사(慶弔事)가 있으면 당골래가 오리걸음으로 아장거리며 집에 왔다. 당골래는 길흉화복을 점치고 제물을 차려놓고 가무와 의식으로 신에게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무당이다.

70년쯤 전일까? 내 생일에 당골래가 왔다. 생일상을 차렸다. 팥찰밥, 미역국, 떡, 전, 나물, 과일로 빼곡했다. 퇴락된 집안이라 가난했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생일상에 넘쳐흘렀다. 늦깎이 막내를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겼기에…

마루에 정화수를 가득 채운 물독에 바가지를 엎어놓았다. 당골래는 양손에 막대기를 들고 바가지를 두드리며 ‘선산 김씨 막내손자님이 무탈하게 자라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삼신할머니께서 돌봐주소서’란 주문을 가락으로 읊었다.

무당굿이 끝나면 당골래가 큰방으로 들어와 두 손을 잃은 할머니 팔을 어루만지며 “당골래라고 천대하는 사람이 많네요. 우리 집안도 밀양 박 씨 양반 핏줄인데…”라며 밀양 박 씨 할머니께 서러움을 하소연했다.
할머니는 “그래, 우리 밀양 박 씨가 양반이지. 허나 반상(班常)이 무너진 지 언젠데 양반 상놈이 어디 있어? 누가 누구를 괄시해?”라며 “자식들 잘 키우시게”라며 타일렀다. 당골래가 돌아갈 때, 할머니는 복채와 무당차지를 잘 챙겨 주라고 어머니께 일렀다.

짓궂게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형님이 당골래의 손녀 기생을 건드려 아들을 낳았다. 헌칠한 키에 뛰어난 미모였다. 기생은 천민이었지만 가무(歌舞)와 서화(書畵)와 시문(詩文)을 익힌 예인(藝人)이었고 예의범절이 밝았다.

아버지는 산모를 위무해 주라했다. 어머니는 “나는 그럴 수 없소”란 대답에 집안이 소란해졌다. 아버지는 핏줄이 태어났음으로 불문곡직하고 산모를 위무하는 것이 도리라 했다.

어머니는 첫아이를 임신 중인 며느리를 두고 기생을 건드린 아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맞섰다. 사고로 두 손을 잃은 할머니를 스물아홉 해 동안 수발하고 육남매를 양육하며 순명(順命)의 세월을 살았다. 여성이 여성을 잃은 석녀(石女)였다. 허나, 자기가 겪은 단장(斷腸)의 아픔을 며느리에게 대물림해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당골래는 우리 집을 무상출입했으나, 기생은 핏줄을 생산하고도 우리 집 문턱을 넘지 못 했다. 아들을 다리고 고향을 떠났다. 타향에서 수절하며 아들을 잘 키웠다.

할머니가 당골래에게 “반상이 무너진 세상에 누가 누구를 괄시해. 자식들 잘 키우시게”란 당부를 상면도 못한 기생 손자며느리가 받들었다. 당골래가 그녀의 손녀에게 할머니의 당부를 전해서일까?

허나, 기생의 소생은 호적상 엄연한 장손이면서도 서자란 너울을 벗질 못 했다. 반상이 무너졌는데도 풍습이란 사슬에 얽매여 기생 모자는 오랜 세월 눈물을 훔치며 살았다.

귀천 빈부 가문 등 차별은 세상 곳곳에 뿌리내려 관습화 되고 새로운 차별이 확대재생산 되어 가고 있다. 해서, 교황께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어 사회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약자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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