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상선 김문호 사장

▲ 한일상선 김문호 사장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나들이 하기는 지난 칠십 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당시 대한해운공사의 영업과장이던, 서른두 살 때였다. 일본의 모 해운회사를 찾아가서 그들과의 공동배선 문제를 협의하려는 출장이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공산품을 싣고 미국으로 갔다가 곡물이나 원목 등을 싣고 돌아오는 항로에 두 회사의 선박을 적정 간격으로 띄우면서 왕복의 적재 공간을 공동으로 운용하자는 취지였다.

말이 좋아서 공동배선이지 사실은 그들의 선복을 빌려 쓰려는 내심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외항해운은 지극히 미미해서 국적선 전부를 합쳐 봐도 일본의 6대 선사 중 하나의 톤수에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그런 반면, 우리의 대미수출 물량은 제법 늘어나는 추세였다. 남양재인 나왕(Lauan) 원목을 수입해 와서 가공한 합판, 일본에서 들여온 두루마리 철판을 압연처리해서 제작한 쇠파이프 등이 주종이었다. 산업화 초기의 기초 공산품들이었지만 선적 수요로는 요긴한 품목이었다. 거기에 일본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철강재를 보탠다면 두 회사의 화물과 선대의 공동운영은 충분히 채산성을 갖는다는 전망이었다.

그때 내가 탑승수속을 하던 장소는 지금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의 오른편에 2층인가 3층으로 나지막하게 남아있는 바로 그 건물이었다. 그나마 1층은 국내선, 2층은 국제선으로 운영되던 형편이었고, 당시의 내 행장은 짙은 곤 색 싱글 양복에 검정색의 소위 007백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혁명을 하고 나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가던 차림에서 조금의 변동도 없는 입성으로, 캐주얼 복장이란 알지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항해사로 승선하면서 가끔 들렀던 도쿄의 시가지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사무실은 기가 질리도록 드넓었다. 직원들의 책상 사이를 지루하게 가로지른 맞은편 벽면에 일본 해운계의 걸물이라는 후지와라(藤原) 부장의 방이 있었다. 문이 열려 있었지만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의 방문을 알고 기다린 듯 싹싹한 여직원을 따라서 일말의 주눅을 감내하며 방으로 들어서자, 그는 사무실이 떠나라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명패가 놓인 책상에 그대로 앉은 채였다. 그러기를 한동안, 나를 응접탁자로 안내하면서도 만면의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걸물인가 괴물인가 하면서도 예기하지 못 한 파격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물었다.

“부장님, 왜 웃으십니까?”

그가 거침없이 받았다.

“너는 마도로스다. 술과 여자만으로 족한 마도로스가 해운을 영업한다니 우습지 않으냐. 이보다 더한 코미디가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짓궂은 웃음기의 표정으로 빤히 건너다보는 것이었다. 이에야 나도 능청을 떨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랫배에 힘을 넣으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지와라 부장을 만나고 보니 일본이 섬나라임을 알겠다.”

“무슨 소리냐? 설명하라.”

“부장은 한국의 해양대학을 일본의 상선대학 부류쯤으로 아는 모양인데 이는 전적으로 편협한 시각의 오류다. 일본의 상선대학이야 학과만 다를 뿐, 고만고만한 삼류의 일반대학에 지나지 않지만 한국의 해양대학은 그렇지 않다. 수업료와 재학 중의 의식주 일체를 국가가 부담하는 상선사관학교로서 특차의 선발고사에 전국의 준재들이 운집한다. 아직은 가난한 저개발국가에서 이만한 특전은 대단한 매력이기 때문이다. 수 십대일의 학과시험과 엄격한 인성검사로 선발된 백 명이 군사사관학교에 진배없이 엄격한 단련과 학업으로 4년을 일관한다. 상선사관으로서의 필수과목 외에 해운경영, 해상법, 열역학과 재료공학까지 섭렵하면서 정원의 30퍼센트 가량이 중도에 탈락되는 치열한 과정이다. 지구상 어디에 이만한 해운인력의 양성기관이 있는가?”

내친 김에 더욱 밀어붙였다.

“미국의 상선사관학교인 킹즈 포인트(King's Point)만 해도 그렇다. 그들 또한 엄격한 규율생활을 하면서 전 학년이 4년 동안 똑같은 과목을 이수한다. 그러고는 졸업과 동시에 항해사, 기관사, 통신사 면허 중 하나에서 셋까지 각자의 취향과 능력껏 취득한다. 똑같은 4년의 학업으로도 항해사 아니면 기관사 면허 하나를 취득하기에 급급한 일본의 상선대학들을 그들과 비교한다면 그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의 좁은 소견이 아닌가.”

그래도 그는 여전히 뜻 모를 웃음만으로 뜨뜻미지근했으므로 나는 열변의 강도를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작으나마 오늘의 대한민국 해운을 이끌고 있는 한국해양대학 출신들의 존재를 후지와라 부장이 모른다는 것인가? 머잖은 장래에 한국의 해운이 일본의 그것과 어깨를 겨눌 날이 올 것이다. 일본 부정기해운의 선각이라는 당신이 개발도상국의 건강한 수재들의 ‘포텐샬 에너지’를 진정 모른단 말인가?”

그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좋다. 실력은 모르겠지만, ‘곤조(根性)’만은 있는 것 같으니 어디 한 번 해 보자.”

그러나 여전히 속내 모를 벙긋 웃음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나를 게이샤들이 시중을 드는 긴자의 전통 주점으로 초대했고, 스무 살이나 어린 나와 격의 없이 대작해 주었다. 소문대로 그의 주량이 대단했다.

그날 이후 나의 업무 상대는 그의 부하 과장이었다. 그러나 내가 도쿄에 들를 때면 당시 아까사까(赤坂)에서 성업 중이던 육체파 여배우 최 모 씨의 클럽 아니면 가수 강 누구의 한국형 룸사롱으로 그를 불러내는 일을 잊지 않았고, 그는 나의 초대에 빠짐없이 응해 주었다. 이슥한 시간에 얼근해지면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유창하게 불러 제켰다. 그리고는 당시 일본 엥카(戀歌)의 여왕으로 드날리던 한국계 여자가수 ‘미조라 히바리(美空 雲雀)’의 히트곡들을 열창하곤 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첫 대면시의 철부지가 매양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해운공사가 없어지고 나의 도쿄 쪽 발길이 뜸해지면서 나도 몰래 잊고 지낸 지 어언 이십여 년. 한국의 해운선대가 일본의 그것에 비견할 만큼 성장한 지금, 그가 애창하던 미조라 히바리의 노래 가사 말마따나 그 사람 지금쯤은 어이하고 있을까(아이쯔 이마고로 도우 시데루)?”

그가 문득 떠오른 것은 후지와라라는 일본 성씨의 가문은 백제에서 유래한다고 우연히 읽은 근래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가 자신의 뿌리를 그때에도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인가.(1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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