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미안해’란 한 마디

▲ 耕海 김종길
그가 나에게 말 했다.

「그러니까, 50년쯤 됐다. 지방 소도시였다. 3․1절 행사를 기관단체와 학교가 공동으로 치렀다. 행사가 끝나고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분과 다방에 갔다. 여자가 뒤따라왔다. 자리에 앉지를 않고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를 자기 직원이라 소개했다.

단발머리에 흰 블라우스와 검정색 스커트를 입은 모습이 여고생 티를 채 못 벗어 앳돼 보였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가르마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머리 밑으로 눈길이 갔다. 청옥처럼 파랗게 윤기가 흘렀다. 옷매무새와 머리손질이 단정해 한 포기 난(蘭)인 양 청초했다.

그 뒤, 출퇴근길에 가끔 만났다. 눈인사를 하며 스쳐갔다. 계속되면서 한 발자국씩 더 다가갔다.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면서 소녀의 부풀은 꿈을 들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까마득한 수평선 그 너머 미지의 세계를 이야기했다. 나는 연고없는 타향에서 그렇게 외로움을 삭혔다.

서울로 발령이나 기차역으로 갔다.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날 전송하려고?”라 물었다. 그게 아니란 듯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면?”, “서울 갈려고요”, “잘 됐네. 혼자 가면 심심할 터인데”

그녀가 내 발령을 알고 휴가를 낸 것을 몰랐다. 이렇게 서울로 함께 왔다.

주중에 연락을 못하다가 토요일에 전화를 했다. 그냥 돌려보내면 매정할 것 같아 교외선을 타고 송추로 갔다. 기차가 연착되어 밤늦게 서울역에 도착했다. 친척어른 집에 야밤에 들어갈 수 없다며 돈암동 친구의 자취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시골 큰아기를 혼자 보낼 수 없어 나도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려 깜깜한 골목길을 헤맸으나 집을 찾지 못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했다. 어쩔 수 없이 여관으로 갔다. 종업원에게 이불을 한 채 더 달라고 했더니 ‘그렇고 그런데 웬 내숭이야’란 표정으로 빤히 쳐다봤다. 다시 부탁해 이불 한 채를 더 가져왔다.

이튿날 여관을 나오면서 “간도 크지, 처녀가 어떻게 남자를 따라 여관에 들어가누”, “믿으니까”, “누굴 믿어? 남자들은 다 맹수야. 이 맹추야!” 우리는 아침을 먹고 헤어졌다.

내 생일에 그녀가 또 서울에 왔다. 함께 밤을 지새웠다. “왜 또 왔어?”, “보고 싶으니까요”, “내가 언제 도둑놈이 될 줄을 나도 몰라”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봤다. 나이 차이가 있어 누이동생으로 여겼으나 그녀는 그렇질 안했나보다.

연락이 뚝 끊겼다가 내가 결혼할 무렵 편지가 왔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안녕히’란 열한 자를 편지 한 장 한 장에 번호로 매긴 11쪽 긴 편지였다.

‘…… 꽃향기 그윽한 정원을 함께 걸었다. 황홀했다. 잠을 깨니 꿈이었다. 현실은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에 나 홀로다. 꿈은 꿈일 뿐. 꿈을 붙잡아 둘 수도 없고, 꿈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어찌 할 바를 몰라 허공을 쳐다봤다.……’란 애절한 표현이었다.

마음이 저렸지만 오뉴월 소나기처럼 지나가는 소녀의 감상이라 생각했다. 책임질 행위를 안 했기에 책임이 없다는 기계적인 사고였는지 모른다. 남자의 편이한 이기심이었을까? 세월이 지나면서 그녀가 생각나면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길 빌었다.

그러다 딸과 손녀들이 장성하여 이성을 그리워하며 열병을 앓는 것을 지켜봤다. 그제야 그녀가 얼마나 아파했는가를 알았다. 사람들은 잔인한 일을 하고도 그걸 깨닫지 못한다. 나도 그랬다.

꼭 만나서 ‘미안해’란 한 마디를 해 주고 싶었다. 그녀를 수소문했다. 미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도 산산이 부서졌다. 인연은 한번 흘러가면 되돌릴 수 없는 건가?」

오랜 세월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애틋한 이야기를 토해내선지 그의 표정이 한결 후련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미안해란 한 마디 안 해도 괜찮아. 꽃봉오리를 꺾지 않고 고이 지켜주었으니까. 그녀는 철부지 소녀일 때의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간직할 걸. 아마도 그때가 못내 그리워 가끔 꿈을 꾸는지도 몰라. 그런데 아무리 50년 전이라지만, 세상에 그런 플라토닉이 또 있을까?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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