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현 보양해운㈜ 대표이사

우리는 왜 먼 곳을 그리워하는가? 먼 곳은 그리움을 빚어내는 매혹의 공간이다. 그리우면 떠나야 한다. 굳이 뭘 찾아야 하는가? 모든 세상에 끝에 우리가 찾는 '심연'은 없다. 몸을 움직여 떠났다는 자체가 의미 있는 행동이다.

여행은 떠남과 돌아옴의 반복이다. 멀리 떠난 자들은 다시 떠나온 곳이 그리워 다시 돌아온다. 이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하고 무의미할지라고 이 세상의 단기 체류 시간 여행자인 나는 어딘가로 떠나는 새벽의 뺨을 스치는 찬 공기가 그립다.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을 머리에 이고 눈부신 햇살을 눈썹에 걸고 낯선 길 위를 걷는 날 오감을 활짝 열고 주변을 기웃거린다. 도시가 깨어나고 세상이 깨어나는 새벽을 관찰하고 걸으며 세상을 바라본다. 긴 해안선을 따라 노을이 지는 저 너머는 목마른 욕망의 오아시스다. 왜 떠나지 않겠는가?

어쩌면 여행은 인생이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걷는다. 고비사막을 홀로 건넌 독일의 오지 여행자 라인홀트 메스너는 고백한다. “나는 사막을 통과하고 다시 한 번 빠져나온 것만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험난한 텅 빈 공간의 여정이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의 말처럼 여행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있지도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원래 안락함이란 익숙한 일상이나 집에도 없고 여행길에도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디를 떠나서 아무리 찾아도 우리가 찾는 진리의 '심연'은 없다. 떠나가서 '익숙함'과 '낯섬'을 비교하고 나를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진 시간여행자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쇠함'과 '사라짐'의 덧없는 것들에 대하여 들여다봐야 한다.

여행은 과정이다. 삶과 여행에 관한 수많은 경구 중에 나를 사로잡은 한 마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지중해 기행>의 프롤로그에서 인간의 가치는 ‘용감하게 살다 죽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다’를 외친 작가답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쇠하고 덧없이 사라진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덧없음에 항거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여행이다. 익숙한 세계를 떠나 도전과 시련이 기다리는 거친 바다나 불모의 사막의 여행길에 나선다. 그 도전과 시련을 겪으며 소소한 깨달음과 감탄을 하며 성숙해진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밸은 “인류의 모든 전설과 신화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스토리들이 헤어짐, 성숙, 그리고 귀향으로 이어지는 인류 공통의 ‘단일 신화’라고 이야기한다. 익숙한 것과 헤어져 낯선 것들을 만나며 비우기도 하고 채우기도 하면서 내면을 들여다본다. ‘응집력 있는 심상’을 만들면서 온몸으로 기억해 간다. 기억은 삶이고 나는 기억이다. 여행은 목적이 아닌 과정이다. 그러면서 성숙해진다.

여행은 세상을 읽는 일이며 나를 바로 바라보는 일이다. 여행은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을 들여다보는 책 읽기이자 글쓰기이다. 어느 낯선 땅 낯선 도시를 걷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멋진 풍광을 앞에 두고 커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는 일처럼 근사한 일이 있을까?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직접적 경험이 여행이고 간접적 경험이 책 읽기다. 낯 설었던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체험으로 하나하나 기억해 간다.

여행, 글 읽기, 글쓰기는 닮았다. 다 자신을 찾아 떠난다. 여행이나 글 읽기에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비추어 본다.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 길일뿐이다. 세상을 읽는 방법은 길 위에도 있고 책상에도 있다.

​우리가 먼 곳을 그리워하고 타인의 삶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나를 만나는 길이며 성숙해져서 돌아오려는 본능이다. 여행은 성숙해서 돌아오는 것이고 성숙이란 용감하게 죽는 법을 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떠나고 떠나기 위하여 산다. 덧없음에 온몸으로 저항하라!

▲ 중국 구이조우성 완펑린(萬峰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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