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김종길

사진 한 장

KBS 가요무대가 진주에서 방영됐다. 사회자가 고도(古都) 진주를 역사 문화 교육 도시라 했다. 덧붙여 예향(藝鄕)이라 했다. 예향이란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진주기생은 가무(歌舞) 서화(書畵) 시문(詩文)을 익힌 예기(藝妓)이었다. 진주기생은 순박하고 정절이 두터워 궁중연회에 초청됐다. 하여, 北은 평양, 南은 진주라 할 만큼 진주기생은 조선 8도에서 명성이 높았다.

암울한 시대에 진주기생 두 분은 샛별이 되어 망망대해를 떠도는 뱃사람들에게 뱃길을 밝혀주었다.
그 한 분은 의기(義妓) 논개다. 임진왜란 때 최경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순국함으로써 진주성이 함락됐다.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기념 연회를 열었다. 논개가 연회에 참석하여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기생의 충절이 사대부들의 쟁권(爭權)을 무색케 했다.

논개의 충절은 진주의 정신이 되어 남강 푸른 물결에 유유히 흐른다. 논개가 투신한 바위를 義巖(의암)이라 부르고, 촉석루 옆에 義妓祠(의기사) 사당을 지어 논개를 추앙한다. 시인 樹洲 변영로는 1923년『신생활』에 논개를 추모하는 시를 실었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또 한 분은 예기 산홍이다. 을사오적 이지용 내부대신이 중추원 고문이 됐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지용이 천금을 가져와 첩이 되어 달라 애원했다. 산홍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얼마나 아리따웠으면 목매어 사랑을 구걸했을까. 산홍의 애국충정 또한 남강에 흐른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이지용을 희롱하는 시 한 수가 실렸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매국노에게 달려가
노복과 여비처럼 굽실거림이 날로 분분한데
그대의 집에 금과 옥이 집보다 높이 쌓였어도
一點 紅 산홍을 사기가 어렵 구나’

재종형이 논개와 산홍의 정신을 이어받은 진주기생의 딸을 죽도록 사랑했다. 어른들은 기생 딸을 종가의 손부로 받아들일 수 없어 극렬 반대했다. 허나, 형님은 죽을 각오하고 맞섰다. 어른들은 하는 수 없이 결혼을 응낙했다.

형님은 수재였다.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 바이올린과 오르간이 수준급이었다. 형수는 기생 어머니로부터 조선의 전통훈육을 받았고 일신고녀에서 신학문을 배운 재원이었다. 미모도 출중했다. 어렵사리 결혼은 했으나 불행히도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조선의 법도를 익힌 형수는 종손부로 대를 끊는 것은 칠거지악이라 자책했다. 스스로 물러났다. 조선의 풍습이 두 사람의 사랑을 매정하게 잘라놓았다. 형수는 종적을 감추었다. 형님은 열병을 앓았다. 그 후 하동 산골 선비의 규수와 재혼했다. 아들을 낳았다. 아들과 형수를 만났다. 형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마음이 저미는 표정이었다. 헤어지기 서러워 눈가에 이슬이 매쳤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형님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6‧25전쟁 때 진주가 불바다가 되어 집이 홀랑 타버렸지. 사진 한 장도 건지지를 못 했어”라며 형수가 보내준 사진이라 했다. 진주고보의 교모와 교복을 입었다.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려 멋을 부렸다. 그냥 사진이 아니고 작품이었다.

세월이 까마득하게 흘렀다. 강산이 몇 번 바뀌었다. 그래도 형님 사진을 간직하고 있는 형수의 시들 줄 모르는 연모, 형님의 형수에 대한 변할 줄 모르는 신뢰. 슬프도록 아름답다.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살다 떠났다. 사랑을 못다 이룬 비련의 여인은 슬픔을 머금은 흑진주이었다. 이젠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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