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이제야, 철들었는가 봐

▲ 耕海 김종길
동네 길을 걷는데 경찰관이 다가와 “어르신, 안녕하세요”란다.

엉겁결에 “예”라 답한다. ‘예’가 안녕하다는 동의인지, 아니면 왜 묻느냐는 반문인지! 말꼬리가 내려가면 동의고, 올라가면 반문이다. 내 ‘예’는 말꼬리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으니 동의도 부정도 아니다. 엉거주춤한 내 ‘예’에 대해 내 스스로 실소를 금치 못한다.

하여, 말은 발음이 정확하고 목청이 맑고 말본새가 반듯해야한다. 말은 인격의 가늠자이다. 물론 글도 그렇다. 리드미컬하고 말본에 맞고 고운 말을 골라 써야한다. 해서, 옛날 인물을 고르는 표준이 말씨와 문필에 신수(身手 : 용모)와 판단력을 더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했는가보다.

그는 이어 “이수 파출소장입니다”란 자기소개에 순간 나는 흠칫한다. 혹시 나도 모르게 범칙행위를 하지 않았나 하여… 그리곤 “어르신, 지나시는 길에 파출소에 들려 차 한 잔 하시지요”란 말에 마음이 놓여 “그러지요”라 답한다.

경찰관 특유의 냉랭한 말투가 아니다. 겸손하고 따뜻하다. 내 아파트까지 바래다준다.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이란 경찰에 대한 선입견이 지워진다.

며칠 후, 나는 파출소에 들른다. 소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고맙습니다”란 내말에 “어째 섭니까?”라 묻는다. “동네 치안이 확보되어 늙은이가 밤길도 마음 놓고 걸을 수 있으니. 잠도 편히 잘 수 있고요”라 답한다. 내 말에 소장은 흐뭇한 표정이다.

사나흘 후, 차 대접을 받은 답례로 수필 책 두 권을 파출소에 가져다준다. 책을 읽고는 고맙다는 전화가 온다. 주민과 경찰이 서로 고마움을 주고받는다. 대한민국이 참 많이 발전됐다. 경찰이 주민의 지팡이가 되었으니.

치매와 당뇨검사를 받으라는 통지를 받고 동회에 간다. 준비가 되지 않아 기다리란다. 동회와 같은 건물에 있는 파출소로 간다. 소장이 가게상인이 아침 첫 손님을 맞은 듯 반가워한다.

소장이 동회장께 나를 소개한다. 동회장이 주민등초본, 혼인신고, 출생사망신고에다 생활복지 등 다양한 업무를 설명해준다. 주민 가까이에서 민원을 해결하는 행정말단기관이다. 동민의 민원업무를 일상적으로 챙겨야하니 동회는 하루도 쉬어갈 수 없다.

은퇴노인과 현직 둘, 셋이서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도란거린다. 동장이 “불편한 일이 있으면 어제든지 말씀하세요”란다. 분위기가 정겹다. 흐뭇하다. 동네에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책을 기증하겠다고 말한다. 동장이 기꺼이 받아들인다. 우선 100여권을 챙겨 연락한다. 동회 직원들이 곧바로 달려와 가져간다.

옛날 현직일 때는 이렇게 하지 못했다. 나와 상응한 직위나 그 이상의 인사들과 교유하는 데 얽매여 이웃을 돌보지 못했다. 직무상 어쩔 수 없었겠지만. 나도 상대도 그 직위만 눈에 들어오지 사람 됨됨은 보이지 안했다. 3부 수장들과 찍은 사진을 벽에 붙여놓았다. 나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분들은 그분들이고 나는 난데 왜 그분들을 나에게 덧씌우려했는지. 참 어리석었다. 허상을 붙들고 용을 썼다. 철이 없었다.

이제야 철이 들어 이웃과 가까워진다. 그들은 나를 기꺼이 돌봐준다. 언제나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을 잡아준다. 그들은 내 이웃이고 나는 그들의 이웃이다.

또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아파트관리소 직원들이다. 냉난방이 고장 난다. 전등이 나간다. 컴퓨터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럴 때 연락을 하면 단숨에 달려와 고쳐준다. 자식이 옆에 있은들 이렇게 내 손발처럼 도와주랴.

미화원은 땀을 뻘뻘 흐리며 청소를 한다. 경비원은 24시간 입주자들의 안전을 보살핀다. 이들이 하루만 게으름을 피워도 아파트가 엉망이 된다. 나는 그들에게 먼저 고개를 숙인다.

관리소장이 꼼꼼하게 아파트를 관리한다. 내 말벗도 되어준다.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다. 세상 사람들이 체험하지 못한 나만의 독특한 삶을 털어 놓는다. 사람은 말을 하고 들어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어눌해진다. 우울해진다. 치매가 온다. 바쁜 세상에 내 말을 인내심 있게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 그는 끝까지 들어준다. 고맙다.

스스로 낮아지니 추락될 리 없다. 잘난 체하지 않아 미움을 사지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흘러버리면 아옹다옹 다투지 않는다. 마음이 편안하다. 세상이 아름답다.

‘이제야, 내가 철이 들었는가 봐’하고 나 홀로 쓴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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