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초등학교 교문으로 들어가려는데 동급생 여자 네댓이 조잘거리며 교문을 나온다. 홍당무가 된 나는 교문으로 못 들어가고 그대로 걷는다. 한참 걷다가 되돌아보니 여자애 하나가 뒤따라온다. 내가 빠르게 가면 빠르게, 느리게 가면 느리게 따라온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내가 멈춰서 “왜 자꾸 따라와!”라며 쏘아봤다. 대꾸 않고 빙그레 웃는다. “애들이 보면 어쩌려고?” “보려면 보라지. 무엇이 무서워. 이 겁쟁이 바보야!”라며 바싹 다가선다. 어쩔 수 없이 나란히 걷는다. 내가 그의 가방을 들고서.

섬진강 다리 가까이에서 방향을 바꿔 송림으로 간다. 노송이 꼬이고 휘어져 옆으로 뻗어있다. 둘이서 노송 둥치에 앉아 백사장을 바라본다. 백사장은 은빛으로 빤작이고 아지랑이가 하늘거린다. 강물은 흐르는데 강 건너 무등산 그림자는 흐르지 않고 강심에 넘실거린다.

그의 손을 만지려하니 두 손을 등 뒤로 감춘다. 내 두 팔을 벌려 그를 감싸 등 뒤 두 손을 붙잡는다. 손이 꽃처럼 예쁘고 향긋하다 ……」

꿈을 꿨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보다. 어머니가 내 볼기를 다독거리며 “우리 막내 오늘 웬 늦잠이야. 해가 중천인데”라며 잠을 깨웠다. 꿈이 깨졌다. 화가 났다. “왜 잠을 깨워요!”라며 어머니께 투정을 부렸다.

홑이불을 돌돌말아 안고 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달콤한 꿈을 다시 꾸려고. 정신이 초롱초롱해져 꿈은 다시 꿔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미웠다.

해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 동창회를 했다.

서울, 부산, 대구, 진주에 흩어져 살던 불알친구들이 고향에 모였다. 이산가족이 상봉이나 한 듯 반가워 얼싸안았다. 쌍계사 골짜기 펜션에는 어린 시절 추억들이 넘쳐흐르고 흘러간 노래로 회포를 풀었다.

모이는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세월의 무게에 눌려 세상을 떠났다. 살아있어도 힘이 딸려 참석하지 못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 깜깜한 숫자도 늘어만 갔다. 그들이 보고 싶었다.

올해 동창회는 고향지킴이들이 준비했다. 송림에 널찍한 자리를 펴고 둘러 앉았다. 잔칫상이 푸짐했다. 고등학교 음악교사였던 친구의 아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교가를 부르며 동창회가 시작됐다. 얼큰하게 취해 동요, 유행가, 가곡 가릴 것 없이 열창했다. 나이는 들었어도 노랫소리는 청아했다. 여자 친구의 이태리 가곡에 박수가 쏟아졌다.

노량바다를 딛고서 지리산에 등을 기대고 섬진강을 품은 이 아름다운 내 고향에서 죽마지우들의 향연이 내년에도 이어지려는지! 사람도 산천도 옛 모습은 자꾸만 사라져간다.

멀찌감치 떨어진 벤치에 할아버지, 할머니 둘이 앉아있다. 되돌릴 수 없는 세월 저편에서 꿈에 만났던 그 머슴애와 그 가시내 둘이다. 세월을 붙잡지 못해 몸은 시들었어도 마음은 옛 그대로다. 둘이서 손잡고 놀았던 그 노송은 베어져 흔적 없이 사라졌는데도.

"네가 그랬었고, 내가 저랬었고"하며 도란거린다. 머슴애는 쑥스러워 할까 말까 망설이다 꿈 이야기를 멋쩍게 한다. 가시내는 "그런 꿈을 꿨어"라고 말은 태연했으나 주름진 얼굴에 분홍빛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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