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그분은 가셨어도

▲ 耕海 김종길
<故김상진 KR회장을 그리며>

그분은 대학선배에다 직장상관이었다.

공무원 30년에 많은 상관을 모셨지만 그분은 내 인생의 사표였다. 2013년 10월 18일 향년 89세로 떠나신 영전에 '세상을 올곧게 사시느라 얼마나 고달팠습니까?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고 영면하시옵소서'라며 분향재배했다.

임종을 상상해봤다.

연민에 찬 눈빛으로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오"라며 부인을 바라봤다. 자식들에겐 세상 부끄럽게 살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이에 앞서, 수모와 좌절, 보람과 영광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했던 해운인생이 주마강산처럼 가물거려 "그래도 내 해운인생이 아름다웠다"며 미소를 머금었다.

생전에 간간히 안부전화를 드리고 1년에 한두 차례 점심을 함께하면서 해운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장례 때는 슬픔이 그저 그만했으나 날이 갈수록 사무친다. 가슴 한 구석이 휑하게 뚫린 듯하다. 울적한 이 마음 뉘에게 틀어놓으랴!

내가 초년생일 때 그분을 과장으로 모셨다. 기안을 올리면 한 번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내용을 곱씹어 빨간 볼펜으로 고쳐 되돌아왔다. 이렇게 3개월간 철저히 훈련시킨 뒤 보지도 않고 결재를 했다. 이정도면 됐다고 판단했던가 보다.

당시 공무원들은 배가 고팠다. 야근을 하면 불고기집으로 데려가 배불리 먹였다. 부하들을 알뜰히 챙겼으나 상관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못 봤다. 자화자찬하지 않고, 남을 돕고도 생색내지 않았다. 선비정신으로 고고하게 살았으니 가족들의 고생은 보나마나였다.

지방으로 출장 온 그분을 모시려면 다시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기다리다 소재를 수소문해보면 이미 다음 출장지에 가 있었다. 자기관리가 지나쳐 인간미가 없다고들 했다. 하기야 주고받아야만 인간미가 있다는 세상이니.

거제군 사등면에서 태어났다. 가뭄이 들면 천수답이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졌다. 농부들이 논에 물을 끌어오느라 밤을 지새웠다. 샘물도 말라 마실 물을 찾아 애태우는 것을 보며 자랐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통영으로 장보러 갔다. 할머니는 장터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전 한 닢을 손에 쥐어주었다. 어머니는 몇 푼을 아끼려고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물건을 흥정했다. 그걸 보고 성장해 어려운 사람들의 아픔을 알고 근검절약과 이웃사랑이 몸에 배였다. 명절이 되면 오히려 쓸쓸해지는 소외된 직원을 챙기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위문했다

해군장교로 제대하고서 해운행정에 발을 내디뎠다. 16세기 이후 해운진흥에 주력한 국가들이 세계 열강이 되었다고 예산당국을 설득했다. 해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선박확충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 제도를 도입하여 해운입국의 기반을 다졌다.

전통해운관료로 항로, 선원, 선박, 항만, 그리고 항로표지까지 해운행정을 두루 섭렵했다. 열정을 불태우다 부산해운항만청장을 마지막으로 25년 공무원을 마감했다. 이어 해운단체장으로 취임했다. 새 포도주를 담을 새 청사를 신축했다. 국제적인 선급으로 발전시키려고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개혁에는 반발이 있기 마련이다. 신축 부지를 비싸게 매입했다고, 설계비를 과다 지출했다고 음해했다. 수사담당 검사가 대한민국에 이런 청렴한 공직자가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했단다.

내가 지방출장을 갔다. 그분의 대학 동기가 건네주는 성의를 사양했다. 생각을 바꾸어 전복 바구니를 들고 공항으로 달려와 “어쩌면 상진이와 그렇게도 빼닮았소!”라 하기에 “저는 그분을 본받으려했으나 아직 멀었습니다”라 답했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처럼 청탁(淸濁)을 병탄(倂呑)했다면 일신이 편했을 것을 포은의 단심가(丹心歌)를 읊으며 흔들림 없는 삶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불행히도 위암이 발병됐다. 의료진과 가족이 수술을 간곡하게 권유했으나 거부했다. 통증을 참으며 운명에 순응하다 초연히 가셨다. 영안실은 번거롭지 않고 경건했다. 생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몸은 가셨어도 정신은 살아 숨 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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