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영면하소서!

▲ 耕海 김종길
나는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비록 퇴락한 집안이지만 조부모와 부모, 형 둘과 누나 셋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해서, 사랑은 받는 걸로만 알았지 주는 건 몰랐다. 사랑이 넘쳐 그 존귀함을 몰랐다.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많이 울었다. 슬프고 무서워서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무덤덤했다. 아버지께 애틋한 사랑을 느끼지 못해서였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오래도록 울었다. 다 큰 사내가 운다고 흉볼까봐 이불을 둘러쓰고 울었다. 생살을 도려내듯 아팠다.

둘째형님이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뉴기니에서 전사했다.

어머니는 엄동설한에도 새벽에 찬물로 머리를 감았다. 머리칼에 고드름을 달고서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천지신명님께 빌었다. 허나,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뉴기니 전선에서 16만 명이 사망했다. 미군, 호주군, 일본군, 현지주민을 합쳐, 조선인 병사 5천명이 포함된 숫자였다. '태평양전쟁사'에 미군 선봉대장이 '일본군 야전병원의 참상에 몸서리쳤다. 수많은 시체들이 방치된 채 부패됐다. 겨우 목숨만 붙은 병사들이 아사 직전의 벌레들처럼 꿈틀거렸다'라고 기술했다. 내 형님도 그 중 하나였는지 모른다.

단 세 사람의 태평양전쟁유족이 적도너머 뉴기니로 날아갔다. 2002년 4월 30일. 태극기를 게양하고 위령제를 올렸다.

추모사를 낭독했다.

'참혹한 태평양전쟁이 끝났음에도 이역만리 뉴기니 정글을 떠도는 영령들 이시어! 일제가 패망하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반세기가 지난 이제야 영령들 앞에 엎드린 저희를 용서하소서. -중략- 원한의 눈물을 닦아드릴 그날이 올 것이오니 피맺힌 통한을 접어두시고 이제 편히 잠드소서’

민족의 비애와 형님의 참상이 떠올라 목이 메여 낭독을 몇 번이나 멈췄다.

형제자매 모두가 세상을 떠나고 둘째누님과 나, 둘만 남았다.

누님이 가끔 "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란 말씀에 "생사가 인력으로 됩니까?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지요"라고 답했다. 누님이 낙상하여 다리가 골절돼 입원했다. 9순의 높은 연세라 정신이 맑았다, 흐렸다했다. 애처로워 "하느님 저의 누님을 빨리 데려가소서"라고 기도했다.

입원한 지 두 달쯤 됐다. 큰 며느리가 물을 떠드리는데 "그만, 날 눕혀 다오"라 하곤 잠자듯 숨을 거뒀다.
‘추모의 시간’에 추도사를 올렸다.

…… 누님은 효부상을 받으신 어머니를 본받아 심지가 굳고 마음이 고왔습니다. 미모도 출중해 젊은이들이 선망했습니다. 여러 곳으로부터 청혼을 받아 명문가로 출가하셨습니다. 세 아들의 교육에 열정을 쏟으셨습니다.

막내 동생인 저에게 사랑이 각별하셨습니다. 노쇠한 어머니를 대신해 암죽을 먹이고 업어 키웠습니다. 대학까지 공부시켰습니다. 누님은 어머니를 대신한 나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럼에도 보은(報恩)을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느님, 저의 누님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주소서!

공교롭게도 누님은 내 생일날 돌아가셨다. 2015년 7월 9일 오후 7시 38분. 날 홀로 남겨두고 떠나기가 마음아파 내 생일날까지 고통을 참고 견디셨나보다.

입관에 앞서 메이크업을 했다. 옛 모습이 은은하게 되살아났다. 깨끗하고 예뻤다. 꽃들이 만발한 관속에 눕혔다. 아름다웠다. 관 뚜껑을 덮었다. 그 고운 얼굴! 언제 다시 뵈올 수 있을지.

발인예식 후, 리무진으로 운구해 집에서 노제를 지냈다. 장손이 영정을 받들어 모시고 집 안팎을 돌았다. 손수 지었던 그 집이 타향살이를 하면서 얼마나 그리웠을까?

한줌의 재가 되어 납골함에 담겼다. 납골당에 안치된 납골함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누님 잘 가세요"라며 오열했다. 땀과 한숨과 눈물로 이룩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빈손으로 떠나셨다. 나그네 인생에 왜 그렇게도 매달리셨는지!

누님! 이제 모든 미련과 무거운 짐 다 내려놓으시고 영면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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