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강을 건너야 해

“혜인아, 네가 대학생이라니! 꿈만 같다.

아침 출근길에 너를 만나려 산부인과에 갔다. 엄마 뱃속에서 나온 지 서너 시간쯤 되었을까? 꼬마 인형처럼 앙증스런 네가 나를 빤히 보던 그 눈망울이 지금도 선하다. 이렇게 너와 내가 첫 대면을 했다. 19년 전에.
할머니가 널 강보(襁褓)에 싸 집으로 데려왔다. 젖 달라고 응애응애, 기저귀 갈아달라고 찡얼찡얼, 졸리다고 응아응아, 자면서 웃고 찡긋거리며 배냇짓하던 너. '저것 좀 봐'하며 함박웃음이 집에 넘쳤다.

나는 널 데리고 목욕탕에 다녔다. 어느 날 목욕탕 여주인이 '이제 그만 데려 오세요'란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내 행운의 마스코트를 데려오지 말라니! 남자목욕탕에 데려가서는 안될 만큼 컸는데도 그걸 몰랐으니. 지금은 손녀가 다섯이지만 그땐 하나뿐인 너에게 홀랑 빠져 사리분별을 못했던가봐.

그랬던 너와 내가 대학캠퍼스를 산책 하다니! 뿌듯하다. 자유와 낭만의 상아탑. 심장은 고동치고 미래가 약속된 희망의 전당. 130년 여성 지도자를 잉태한 산실(産室)에서.

너는 온실의 화초처럼 자랐다. 바깥 세상은 춥고 배고프고 살벌하다. 넌 그걸 모르고 초ㆍ중ㆍ고에서 네 손과 악기가 합쳐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었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엄마의 지칠 줄 모르는 박차(拍車)가 너를 강을 건너게 했다. 너도 손가락에 피를 흘리며 힘들었지만. 대학입시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너 세 사람의 공통분모였다.

이젠 그 공통분모는 사라졌다. 엄마와 아빠가 네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다. 생각이 다르고 여건도 녹록치 않기 때문에. 네 스스로 수많은 강을 건너야해. 홀로 건널 수 없을 때 도움을 청해라. 도움을 받으려면 상대를 설득해야한다. 설득에는 논리가 정연해야해.

핵가족 시대다. 아이를 아예 낳지 않거나 한둘밖에 낳지 않는다. 해서, 아이들을 과잉보호해 정신력이 나약하다. 너도 그럴지 모른다. 사회는 맹수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정글이다. 살아남아 강을 건너야 한다. 준비해라.

할아버지 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일제가 말과 글, 성과 이름, 생명과 재산, 땅과 하늘까지 빼앗았다. 광복이 되었어도 빼앗긴 것을 되찾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은 남은 것마저 빼앗아 갔다. 찢어지게 가난했다. 깡다구로 버텨 강을 건넜다. 그때 내가 지금 네 또래였다. 60년 전. 그러고도 많은 강을 건넜다.

너는 성년이 됐다.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나라를 책임질 대표를 선출할 자격도 있다.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강을 건널 책임이 너에게 있다. 강은 평온치 않다. 파랑이 일고, 안개가 끼고, 눈보라가 친다. 암초도 도사리고 있다.

10년 공든 탑 무너질라. 다시 손가락에 피 흘리며 갈고 닦아라. 교수의 지혜를 배우고. 선배들이 어떻게 강을 건넜는지 살펴보고. 유학도 하고. 그렇질 못하면 좌절한다. 식물인간이 된다."

잠깐 숨을 고르고는

"혜인아, 내 말에 공감하니?"

"고마워, 할아버지"

"뭐가?"

"여태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우쳐 주셔서"

"나도 네가 고맙다. 이 귀여운 것!"이라고 말하며 어깨를 다독거린다. 흐뭇하다.

외손녀 둘, 친손녀 셋이 모두 건강하다. 내 잔이 넘치는 축복이다. 첫째 혜인이가 앞장서고 넷이 뒤따른다. 서로 밀고 당기며 강을 건너는 모습을 상상한다. 참 행복하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내 마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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