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한국이 IMO사무총장을 배출하다니!

21세기 해양시대에, 한국이 세계해양대통령 IMO(국제해사기구)사무총장을 배출하다니! 30년 전으로 돌아가서 보면 기적이다.

1982년 12월 20일 해운항만청 선원선박국장으로 발령되어 사무실을 둘러봤다. 포장된 채 서류가 캐비넷에 쌓여있었다. IMO문서였다. 해양오염이 심각해 선진국에서 항만국통제(PSC)가 실시되던 때였다. 국적선박과 한국인송출선박이 PSC에 지적되어 붙잡히고 있는데 IMO문서가 방치되다니! 황당했다.

최대한의 행정적 지원을 약속하고 한국선급(KR)에 IMO문서를 인계했다. KR은 IMO사무국을 설치하고 김태우 부장에게 이를 맡겼다. 동시에 해운과 조선 전문가로 IMO연구위원회를 구성해 사무국과 협조하여 IMO문서를 정리하고 협약을 번역·출간했다.

해운항만청은 선원훈련자격당직협약(STCW)과 해양오염방지협약(MARPOL)을 수락하고 선박직원법 등 국내법을 전면개정했다. 특히 종신제였던 해기사 면허를 5년으로 한정했다. 해기연수원을 설립해 여기서 재교육을 받아 면허를 갱신토록 했다. 이렇게 IMO 불모지 개간을 시작했다.

이후 김태우는 KR런던사무소장으로 발령되어 IMO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당시 벌크선박의 사고가 빈번하여 해운계와 보험계의 이슈가 됐다. 그가 벌크선의 안전기준을 성안하는 작업그룹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겉돌기만 하던 한국이 처음으로 IMO활동에 동참했다.

1983년 10월 23일, 스리바스타바 IMO사무총장이 방한했다. 세계해양대통령인 그를 수상에 준한 예우를 했다. 경찰 선도차의 호위를 받으며 전국을 논스톱으로 주행했다. 그는 인도출신으로 영문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상무성차관보, 교통부차관, 수상비서관, 그리고 선주협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당시 인도가 비동맹그룹의 리더였기에 그의 국제적 위상도 드높았다. 해서, 필요하면 언제나 영국여왕을 알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는 해상안전과 해양환경보존 등의 협약을 제·개정하고, 개발도상국에 해사전문가를 양성할 세계해사대학(WMU) 설립에 열정을 쏟았다. 방한 중에 기자회견, 외무장관과 교통장관과의 면담, KR방문과 선주협회 회장단 오찬에서 해양환경보존의 중요성을 줄기차게 역설했다.

오찬 후, 세수를 하고 와이셔츠를 갈아입고서 청와대를 예방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알현 때도 그랬으리라. 대통령께 WMU 설립 취지를 설명을 드리고 협조를 구했다. 국가원수에 대한 예의가 깍듯했다.  다음날 해양대학을 방문했다. 학교상황을 청취하고 집총한 학생 1200명의 보무당당한 열병을 사열했다. "Fantastic"이란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계 으뜸의 상선대학으로 평가하고 졸업생들이 세계해운에 기여하리라고 예측했다.

울산 현대조선에서 50만 톤의 거대한 드라이도크 바닥까지 내려가 인도가 발주한 신조선의 공정을 살펴보고 사장에게 하자 없는 건조를 당부했다. 애국심이 돋보였다. 경주에서 신라 유적을 관람했다. 하늘을 나는 천마를 넋을 잃고 감상했다.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안목이 높았다.

그가 한국을 떠나는 김해공항에서 IMO 사무국에 한국인을 한사람 채용해 줄 것을 애원하다시피 간청했다. 귀임 후, 해사안전부서에는 불가능하고 경리직원을 채용하겠다는 통보가 왔다. 직무에 대한 열정, 애국심,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 방문국가 원수에 대한 예의, 약속에 대한 신의 등 그의 인격을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났다. 가까이에서 모셨던 4박 5일이 30여년이 흘렀는데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1983년 11월 11일 개최된 IMO 13회 총회에서 한국이 최초로 이사국에 출마했다. 이사회가 IMO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다. 강영훈 주영대사는 한국 경제의 경이적인 발전과 해운의 급신장을 설명하고, IMO에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할 것을 약속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허나, IMO의 높은 장벽을 넘지 못했다. 이태리 90, 라이베리아 72, 한국 31표로 쓴잔을 마셨다.

해양대학 출신 공무원 대부분이 박봉에 생계가 어려워 공직을 떠났다. 해운항만청은 빈자리를 충원하기 위해 선박직 사무관을 특채해 왔다. 1985년에는 종전과 달리 LATT(Language Arts Test) 합격자로 특채자격을 제한했다. 규정에도 없는 제한을 한다고 반대가 극심했다.

허나, 영어 때문에 IMO서류를 KR에 넘겨야만 했던 뼈아픈 경험을 상기하며 압력과 수모를 감내했다. 이때 해운전문지식과 어학실력을 겸비한 임기택이 특채됐다. 그때는 그가 IMO사무총장의 맹아(萌芽)인줄 몰랐다. 그도 나도 그 누구도…

30여년이 흘렀다. 그 맹아가 탐스럽게 싹이 트고 줄기가 튼튼하게 자라나 지혜롭고 열정적인 거목이 됐다. WMU를 졸업했고 해사안전국장, IMO 연락관, 주영대사관 해무관 등 국내외의 요직을 두루 경험했다. 특히 기국준수위원회(FSI)의장, 해무관단 의장 등으로 활약하며 IMO에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우리정부와 해운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덴마크와 러시아 등 쟁쟁한 후보 5명과 거듭된 경합을 거쳐 2015년 6월 30일 IMO 사무총장으로 당선됐다.

해양수산부는 ‘임기택 사무총장이 역량을 발휘하도록 런던에 IMO대표부를 설치하겠다’고 했다. 임기택은 한국의 IMO사무총장이 아니다. 170여 회원국과 사무직원 300여명을 거느리는 방대한 조직의 수장이다. 한국은 IMO사무총장을 배출한 해운과 조선 선진국이다. 기존 협약과 결의안들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현실에 맞지 않거나 미진한 규정들이 많을 것이다. 더욱이 친환경 선박의 출현으로 세계 해운이 변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와 과제를 찾아내 기준과 규범을 새롭게 제·개정하는데 한국이 앞장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임기택 사무총장의 위상이 공고해 질 것이다. 사무총장에게는 선·후진국을 아울러야하는 명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컨트롤타워가 있어야한다. 해양수산부 해사안전국이 해사안전을 지휘 통제하는 컨트롤타워이다. 컨트롤타워가 그 역할을 못하고 있어 아쉽다. 전문가로 인사가 쇄신돼야한다. 해사안전국이 중심이 되어 해양안전심판원과 주영대사관 해양수산관, 세 조직이 유능한 해사전문가로 구성돼 학계와 업계의 지식과 경험을 수렴, IMO를 선도해야 한다.

역대 IMO사무총장들이 시대에 따라 역할이 다르겠지만 인도 출신의 스리바스타바의 업적이 으뜸이다. 우리나라는 난관을 극복하고 해운과 조선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임기택의 개인적 역량도 출중하다. 하여, 임기택이 스리바스타바를 능가하는 족적을 남기리라 확신한다. 스리바스타바 총장은 1983년 방한 중 한국해운의 미래를 예측했다. 시성(詩聖) 타고르는 일제의 식민지로 암울했던 1929년에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 되리라 예언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신비의 대륙 인도의 거성(巨星) 두 분이 한국의 오늘의 영광을 정확하게 예언한 예지(豫知)와 혜안(慧眼)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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