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상선 김문호 대표

해양대학을 졸업하던 해의 겨울방학 며칠을 충무에서 지냈다. 4년의 규율생활 동안 주말 외출에는 조방(조선방직)앞 철길가의 빈대떡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거나 낙동강 하단(下端)의 에덴공원, 혹은 을숙도 갈꽃 밭에서 가을의 밤이슬에 함께 젖던 동기생 다섯 명이었다. 지금은 통영시로 통합되어 있지만, 시와 군이 분리되어 있던 당시에는 충무시와 통영군이 따로따로였다.

마도로스 파이프 형상으로 앉은 청마시인의 낮은 시비(詩碑) 위로 까마득히 올라앉은 깃발이 백조처럼 나부끼는 남망산(南望山)공원의 다도해 조망이 상쾌했다. 연초록 해면에 옥양목 물빛으로 퍼지는 연안선들의 항적(航跡)이 고왔다. 한겨울이건만 어느새 벌겋게 핀 동백꽃 더미의 남국정취가 훈훈했다.

한산도를 위시한 인근의 섬들과 시가지를 넘나들며 술을 마셨다. 중도의 탈락이 심한 4년의 학업과 단련을 무사히 마친다는 안도의 자축이었을까. 이제 곧 생소한 사회로 진입하게 되면 국내와 해외, 해상과 육상으로 흩어져야 한다는 우정의 당혹이 절실하기도 했으리라.

객선 부두 입구의 고만고만한 식당 겸 주점들이 좋았다. 창턱 너머 밤바다를 헤쳐 다니는 소형선들의 고동소리가 산속 목장의 가축 울음인 양 정겨웠다. 그러다가 통금사이렌에 맞춰 주점을 나설 때면 길거리 포장집의 할매김밥이 요긴했다. 어른들의 가운데손가락만 하게 쌀밥을 말고 꼴뚜기 한 마리씩을 얹은 그것은 긴 긴 겨울밤참에 더없는 별미였다.

충렬사 뒷산 중허리의 초가동네를 찾기도 했다. 현지인들이 야마장(山莊?)이라 부르는 색주가들이었다. 통금의 방해 없이 새벽까지 죽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 자투리의 낮 시간에는 중앙통의 다방에서 마담이나 여급들을 불러 앉히고는 ‘김 약국의 딸들’을 불러내라면서 골리곤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일단의 청년들이 우리들을 막아섰다.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에 곱지 않은 인상들이었다. 웬 놈들이 남의 ‘나와바리(영역)’에서 행패냐면서 일을 낼 기세였다.

우리들은 도리 없이 잘못을 사과하고 선처를 빌었다. 없는 듯이 지내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라는 조건으로 진일만은 모면했지만, 이미 호기(豪氣)의 죽지가 부러진 우리들의 충무 회동은 사실상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때 그들 중 형님으로 행세하던 자의 별명이 백곰이라 했다.

내가 안마도의 전탐기지로 발령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한 해 반쯤 뒤였다. 졸업과 동시에 해군소위로 임관해서 일 년여를 승무하던 군함을 하선하면서였다. 그러나 해군의 월파장 유격코스에 해병대 입영훈련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다음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언제라도 꼭 한 번, 섬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네 호기심 내지 염원의 실현이기도 했다.

퇴역어선의 어창에 구겨 앉아서 파랑을 피하며 다섯 시간을 항해한 낙도(落島)였다. 내가 부임인사를 하는 대열에 눈에 익은 안면이 있었다. 드넓은 가슴팍에 작대기 계급장이었다. 그날 저녁의 회식자리에서 내게 경례를 하면서 관등성명을 신고하는 그의 별명이 백곰이라 했다. 회식을 파하면서 내 집무실로 따라온 그가 충무출신이라 했다. 나를 본 기억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뜨악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정황 설명에는 안면을 찌그러뜨리면서 곤혹스러워 했다.

그날 이후,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군대의 원칙 그대로였다. 둘만의 대면에서도 눈길은 정면에 고정한 채, 자세와 언행을 흩뜨리지 않았다. 회식 때면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은 마이크로 주흥을 주도하던 그가 돌변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의 변모는 바로 내 미숙 탓일 것만 같았다. 장교인 나의 생각 없는 반가움의 표시가 졸병인 그로서는 그만한 충격이었을까.

몇 번의 짬에 내 경솔을 시인하면서 양해를 구해봤지만, 뻣뻣하게 기합이 든 그의 원칙에는 미동도 없었다. 한결같은 반응은 “아닙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뿐이었다. 그럴수록 나로서는 그의 응고된 응어리만 감지할 뿐, 그걸 녹여낼 묘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도리어 나를 압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놈의 완벽한 원칙에는 걸고들어 볼 틈이 보이지 않았다.

겨울로 들어서자, 매일이다시피 잦은 눈이었다. 내렸다 하면 무릎에 차는 적설이 섬과 동백 숲을 순백으로 싸안았다. 그러면서 폭설이 동반하는 풍랑에 육지와의 뱃길이 두절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절해의 고도였다.

새로운 천지의 새하얀 정적이 부담스럽지 않고 감미로웠다. 자욱한 강설이 포구로 밀려드는 저녁이면 나루터의 가게로 내려가서 소주를 마시는 것이 내 일과 후의 행로였다. 안주래야 고등어 통조림 하나에 술값은 내가 남긴 빈 병으로 계산하는 방식이어서, 주인마저 초저녁잠에 들고 나면 서쪽 창틀 아래 갯바위를 때리는 파도의 파열음만이 세상 유일의 파적이었다.

그날도 새벽 한 시경이었다, 흠씬 취한 상태로 가게를 나서는데 부엌 쪽 솔가리 더미에서 그가 부스스 일어섰다. 저녁식사를 마친 내가 부대를 나서는 걸 봐 뒀다가 시간을 짐작해서 내려왔다면서, 해안 바위절벽 위의 눈 덮인 너덜길이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고는 사양의 겨를도 없이 내 팔죽지를 끌어 잡았다. 묵직한 악력이었다. 가급적 의존하지 않으려고 뻗대어 보지만, 이미 완벽하게 나를 장악한 그는 요지부동의 나뭇등걸이었다.

저만치 위병소의 불빛이 눈에 들자, 누가 볼세라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녀석의 체온이 얼핏 서운했다. 그러나 한편 이 또한 놈의 끈질긴 과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마치 헤밍웨이의 소설 바다와 노인의 낚시에 걸린 큰 고기가 어디 한 번 보라는 듯 공중으로 전신을 솟구치듯.

내가 제대발령을 받고 섬을 떠나던 이듬해 3월의 그날에는 전 대원이 아침부터 나루터 식당의 회식이었다. 그들의 벽지 격무를 위로하면서 석별의 전우애를 기린다는 취지의 정례 술판이었다. 오후 두 시쯤 거나하게 취한 내가 객선으로 오르려는 순간, 녀석의 두툼한 가슴팍이 지난 어느 날의 악몽처럼 나를 막아섰다. 그러고는 커다란 화환 하나를 내 목에다 걸어 주었다. 섬 갈대로 만든 고리에 잘도 핀 동백꽃이 빈틈없이 가득한 목걸이였다. 그와 내가 불편한 안면으로나마 몇 계절을 함께 지낸 섬 꼭대기의 작전기지 능선에서 허연 눈덩이를 뒤집어쓰면서도 벌겋게 피어오르던 바로 그 꽃송이들이었다.

“야, 사회에 나가거든 출세하라고!”

그가 스스럼없이 내 손을 움켜잡으면서 소리쳤다. 나도 지체 없이 맞받았다.

“알았다 이 자식아, 네놈도 사고치지 말고 잘 지내라고!”

▲ 김문호 한일상선 대표
그가 내게 말을 놓는 것은 결례가 아니었다. 이제 곧 뱃머리가 갯바위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술기운으로 용감해진 백여 대원들이 내게 말을 까는 고성들이 봇물을 이룰 것이었다. 이 또한 섬 부대의 전출행사에서 정례화 된 행사였다.

그로부터 약 삼 년 뒤였다. 당시 대한해운공사의 대미정기선 일등항해사로서 북태평양 대권항로의 유빙해역을 횡단하면서 파랑과 추위로 고투중인 내게 전보가 한 통 날아왔다. “안전항해기원함-백곰”이었다.

나는 그의 근황을 대충 알고 있었다. 통신수병의 실무 지식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선박무선통신사의 면허를 취득해서 지금은 어느 근해 외항선사의 통신사로 승선중이라는 것을. 그러나 모르는 듯 회신을 보냈다. 도대체 어디의 백곰이냐고. 그러자 바로 답신이 날아왔다. “서광백곰입니다-형님.”

지난날 우리 부대의 사서함 주소명이 바로 서광별장이었고, 그는 지금 내 ‘나와바리’에서 나를 형님이라 부르면서 나처럼 대양의 물이랑을 넘나들고 있었다. 흡사 착하고 기특한 북극의 새끼 백곰처럼.(l1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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