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어쩌다 팔순이 되다니!

72년 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1944년 봄날. 엄마 품을 갓 떠난 병아리들이 모였다. 하동국민학교 제38회 입학식이었다. 학교건물이 어쩌면 그렇게도 컸던지! 운동장이 어쩌면 그렇게도 넓었던지! 작은 키에 작은 눈동자이어서 그랬을까. 아무튼 우리는 거기서 처음 만났다.

그때, 우리는 나라도 빼앗기고, 이름도 빼앗겼다. 양식마저 공출로 빼앗겨 배고팠고, 형이 전쟁터로 끌려가 슬피 울었다. 그래도 지구는 여전히 돌고 있었다.

71년 전, 삼천리금수강산이 너울너울 춤추는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의 환희는 잠시일 뿐 좌익 우익은 맞붙어 싸웠다. 우리 고향 너배기 들판에서도 좌익 우익 청년들이 피 흘리던 뼈아픈 기억은 그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잊을 수 없다.

66년 전, 6․25남침으로 한반도는 세계의 전쟁터가 되었다. 우리가 졸업했던 바로 그 해 1950년이다. 부모 슬하에서 행복했어야 할 나이에 전쟁고아가 되고 직업전선으로 내몰렸다.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헐벗고 배고팠다.

50년 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잘 살아보세’란 구호를 외치며 가정에서 직장에서 발 벗고 나섰다. 우리는 핍박 받고 굶주렸지만 우리 자식들은 많이 배워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고 또 일했다.

지금,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어 후진국을 원조하고 있다. 허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가족제도는 무너졌다. 자식들은 드넓은 세상으로 떠났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떠나간 자식들을 그리며 고독하게 살아간다. 배우자마저 떠나면 독거노인으로 남는다.

우리는 이렇게 80년을 살았다. 일제강점기, 해방 후 혼란기, 6․25전쟁과 공산치하, 4․19와 5․16, 산업화와 민주화 등등 수많은 격동기를 겪었다. 우리는 허구한 모진세월을 헤쳐 여기까지 왔다.

이제, 인생 대차대조표를 살펴본다. 부모형제와 사회와 국가에 진 빚이 너무 많아 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가진 것이 없으니 자유롭다.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여생을 편안하게 살련다.

오늘, 2016년 5월 17일이다. 하동과 진주, 부산과 서울 등 전국으로 흩어졌던 동창들이 이곳에 모였다. 동양의 나폴리라 일컫는 아름다운 항구 통영의 리조트에서 팔순 합동 생일잔치를 치르기 위해서다. 세상 근심걱정 다 벗어던지고 취흥에 흠뻑 젖어 노래 부르고 춤추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파라 돌아가고파.

참석치 못한 친구들의 건안(建安)과 세상 떠난 친구들의 영면을 빈다. 그 옛날 함께 모여 웃고 울던 그 얼굴들 보고파라 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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