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아이고! 불쌍한 내 발

아내와 점심을 먹고 일어서다 넘어졌다. 발등이 밥상에 부딪쳤다. 절룩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통증이 왔다. 진통제를 먹었다. 발등, 발가락, 발바닥이 부어올랐다. 잉크를 뿌려놓은 듯 파랗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나흘을 버텼다. 이렇게 두었다가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게 되지 않나하고 불안했다. 정형외과에 갔다. 발을 눕히고, 세우고, 앞으로, 옆으로 자세를 바꾸어가며 엑스레이를 여러 장 찍었다. 그런데도 엑스레이로는 판별할 수 없다고 시티를 찍으란다. 의사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 시티에도 별다른 증상이 없다 했다.

병원들이 경쟁적으로 고가의 의료장비를 들여다 놓고 과잉진료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 몫이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왔다. 물론 의료보험 재정에도 부담을 주겠지만….

병원 대기실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영상을 계속 내보냈다. 의학상식이나 예방의학 등 환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는 없고 오직 자기 병원 선전뿐이었다. 병원에서 돈 냄새가 물씬 풍겨 씁쓸했다.

또 의사가 기브스를 하란다. 뼈가 부러지지도 안했는데도 기브스를 하고서 목발을 집고 다닐 내 모습을 생각만 해도 끔직했다. 그보다도 기브스에 갇힌 발이 얼마나 갑갑할까란 생각이 들었다. 거절했다.

“미안해, 내 발아! 네가 나를 80년간 싣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겨웠니”라며 어루만져 주었다. 며칠 군화를 신고서 훈련하고 행군하다 보면 발이 퉁퉁 부어올랐다. 발을 씻지 않아 발 냄새가 진동했다. 무좀이 창궐해 발톱이 새까맣게 병들었다. 그뿐인가, 조그마한 발에 실려 미국으로 중국으로 유럽으로 드넓은 세상을 헤매고 다녔다.

약속은 줄줄이 취소됐다. 모임에도 일체 참석하지 못했다. 집안에 갇힌 신세가 됐다. 그제야 발이 참으로 소중함을 알았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발을 만져주고 따듯한 물에 담구고 안티푸라민을 발라주며 “아이고! 불쌍한 내 발”하며 다독거렸다. 참 불쌍했다.

“주인님, 저는 너무 억울해요! 좋은 데 나쁜 데를 마다하지 않고 다니면서도 그 광경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저 양말과 신발 속에 갇혀 살았으니 감옥이 따로 없었네요”라며 하소연했다.

옛날, 물을 담은 대야를 손님에게 드렸다. 땀내 나는 발을 씻고 편히 쉬면서 피곤을 풀라는 손님대접이었다. 아파트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아내가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의 발을 씻어주었다.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표시였다. 지금은 여성상위 세상이 되어 그런 풍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아주 옛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기록이 성경에 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준 것은 동서고금 예수님밖에 없다. 2천 년 전,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시대에,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둘렀다.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베드로는 황감해 발 씻기를 사양했다. 예수께서 내가 네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런 몫도 나눌 수 없다고 말하자 베드로가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했다. 발을 씻으면 온몸이 정결해진다고 했다.

발은 온갖 먼지와 불결한 것들이 묻어있는 신체의 밑바닥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밑바닥으로 내려가 제자의 발을 씻겨주고 닦아주었다. 사랑의 실천이었다. 참으로 위대하다. 더욱이 눈 먼이, 귀머거리, 벙어리 등 세상에서 버림받은 밑바닥 인간들을 측은히 여겼다. 그들에게로 닦아가 어루만지며 치유해주었다. 사랑의 완성이었다.

예수님의 세족식보다 먼저 발을 닦아준 기록이 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란 기록이 성경에 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극진히 사랑하고 존경한 사건이다.

남자 신체의 밑바닥 발에 향유를 바르고 여자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주었다니!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사랑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다는 빈축에도 개의치 않았다. 극치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믿기지 않는다. 이처럼 한 남자를 사랑하고 존경한 여자가 세상에 또 있었을까?

두 사건은 분명 극명하게 다르다. 하지만 마리아의 한 남자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예수님의 보편적인 인류 사랑으로 승화되지 않았을까?

세족식은 지금도 교회에서 전래되어 예수님의 대리자 사제가 나에게까지 발을 씻어주었다. 불쌍한 내 발을 어루만지면서 세족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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