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다시 돌아온 옛집

옛집으로 이사 왔다.

내가 살았던 옛집들이 많다. 고향집, 학교 다니느라 객지에서 기식하던 집들, 결혼하고선 발령받으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서울이나 지방 임지로 떠나면 아내가 챙겨온 세간을 풀어놓고 살던 집들, 아이들이 취학하고선 나 홀로 이곳저곳 전전하던 집들, 집시처럼 유랑했다. 그 집집들마다에 얽힌 희로애락을 지금 돌이켜보면 그 추억들이 애련하다.

그 많은 옛집들 중 첫째가 고향집이다.

꿈엔들 잊히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집을! 드넓은 뜰에는 감, 밤, 대추가 주렁주렁 달린 과실나무들. 풀벌레와 새들이 지저귀는 뒤뜰대밭. 아래채와 곡간과 마구간에 꼭꼭 숨어 숨바꼭질하던 소꿉동무들.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애로움, 어머니의 지극정성, 6남매의 막둥이로 형 누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해 행복이 풍성했다.

그랬었던 고향집, 흥망성쇠라지만 망한다한들 어쩌면 그렇게도 망했을까? 폭풍에 가랑잎이 휩쓸려가듯 흔적 없이 사라졌다.

둘째가 지금 이사 온 옛집이다.

내 나이 마흔 아홉이던 1986년이었다. 서울 공해에 견디기 힘들어 공기 맑고 소음 없는 곳을 찾았다. 안양 관악산 자락에 미분양 아파트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았다.

관악산 남쪽 양지바른 곳이라 동네 이름을 冠陽洞(관양동)이라 했던가? 지금은 번화한 도심이 됐지만, 그땐 앞에 펼쳐진 평촌은 허허벌판 논밭이었다. 어린 시절 메뚜기 잡고 콩서리하던 고향 하동 너배기 들판이 연상됐다.

현대건설이란 브랜드가 신뢰되고 규모와 가격이 나에게 꼭 맞았다. 두 말 않고 서울시민에서 경기도민으로 내려앉았다. 허나, 딸과 아들이 대학입시를 앞둬 무모했음을 뒤늦게 알았다. 딸 친구가 ‘너의 아버지 부도났니’라 묻더란다. 창피스럽다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엎질러진 물을 도로 담을 수 없었다.

관양동 현대아파트엔 군부의 귀감이었던 한신장군과 학계와 관계 등 원로들이 많았다. 관우회(冠友會)란 동네모임을 만들어 등산로 청소, 식목일에 나무심고 가꾸는 일, 월례조찬회, 봄가을 관광여행으로 친목을 다졌다. 원로들의 삶과 언행은 나에게 반면교사이었다.

원로 지리학자가 한 분 계셨다. 서울 근교에 이만한 명당이 없다며 풍수지리설로 풀이했다. 관악산 높이가 629m인데 그 정남(正南) 산자락에 자리 잡은 아파트 지번이 629번지다. 절묘하게도 높이와 지번이 같아 관악산 정기를 고스란히 받는다. 지금은 구획정리에 의해 지번이 변경됐지만. 앞에는 동쪽 청계산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르는 동발서류(東發西流)의 학의천이 있다. 뒤에는 웅장한 관악산이 받혀줘 배산임수의 명당 중 명당이라 했다.

풍수설이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세월이 갈수록 나에게 적중했다. 무모하게 이사를 했었지만, 딸과 아들이 명문대학에 합격했다. 불합격됐다면 평생 원망을 들을 뻔했었는데… 훌륭한 배필들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이뤘고, 손녀 다섯 중 셋이 여기서 건강하게 태어났다.

나 역시 13년을 치열하게 살았다. 법령을 제․개정하며 정책을 펼쳤다. 지방관서 수장으로 해운항만 발전에 혼신을 바쳤다.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

신혼의 아들에게 이 집에 살라하고 우리 부부는 남녘으로 더 내려갔다. 그 뒤, 딸이 분양받은 아파트에 손녀 학교 때문에 입주할 수 없다며 나에게 입주를 부탁했다. 노인이 자식 집 봐주는 마음으로 입주해 서울시민으로 복귀됐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울입성 축하!’라 했다. 내가 서울을 떠난 동안 서울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는데 서울로 되돌아왔으니…

내 집에서 살다 세상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미국대학으로 떠나 전세 주었던 옛집으로 되돌아오기로 했다. 17년 만에. 아내는 벌이도 없는데 도배만하고 들어가자고 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이 집과 맺은 인연이 장장 30년이다. 더욱이 행운의 집에 예의를 갖춰야 했다. 집은 물건이 아니다. 가족이 함께 웃고 울며 사는 생명공간이다.

아내가 수리견적을 요리조리 가감을 반복하고, 딸의 젊은 감각을 첨가해 검소하면서도 산뜻하게 수리했다. 새집이 됐다. 대만족이다. 내가 집에 대해 예의를 지키니 집도 나에게 보답을 한다.

의식주는 생활의 기본이다. 또한 의식주는 인격과 품위를 가늠한다. 허영과 낭비를 멀리한 의식주에 만족하니 행복이 찾아온다. 관악산은 더 푸르러졌다. 정원수가 무성하게 자라 녹음이 풍성하다. 폭염이 계속되는데 에어컨 없어도 시원하다. 열대야도 없다. 시골별장에 온 기분이다. 아침 7시면 아내와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행복을 즐긴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