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상선 김문호 대표

▲ 한일상선 김문호 대표
 해마다 음력으로 팔월이 들면 고향동네로 내려간다. 부모 동기(同氣)가 있을 리 없는 산촌이건만 빠짐없이 찾아간다. 팔월의 첫째 일요일로 정해져 있는 문중벌초에 참석하는 일이다.

금요일 오후 아니면 토요일 이른 새벽에 서울의 집을 나선다. 전 문중이 동원되는 윗대 산소의 벌초는 일요일도 느직한 아침에야 시작되지만, 아랫대의 산소들은 가까운 집안끼리 토요일에 둘러보는 관례였다. 그러고는 토요일 저녁의 문중회의에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일정이었다.

문중벌초에의 참석 의무가 지엄했다. 그곳 출신의 성인 남자라면 웬만한 사유로는 결석이 용인되지 않는다. 만에 하나 생업을 핑계로 얼굴 대신 얼마간의 봉투를 내려 보냈다가는 “내년에는 우리가 궐을 할 터이니 지 눔이 내려와서 다 하라 캐라!”라는 질타가 문중회의 좌중에서 가차 없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젊은 날의 그것은 적잖은 부담이었다. 천릿길에 소요되는 경비도 경비지만 그것보다는 말단의 직장생활에 시간 내기가 녹녹하지 않았다. 더구나 토요일도 반공일이라면서 휴무가 아니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음력초하루로 못 박혀 있던 당초의 행사가 팔월의 첫 일요일로 바뀌면서 크게 완화된 부담이었다.

벌초를 일요일로 바꾸는 일이 수월하지 않았다. 수백 년 전통의 숭조행사를 후손들의 편의를 이유로 바꿀 수는 없다는 완고였다. 그렇게 여려 해를 밀고 당긴 끝에 객지살이 후손들의 간청이 어렵게 수용된 결과였다. 그러나 실수 없이 참석해야 한다는 불문율의 서슬이 더욱 강화된 타협이었다.

그러던 벌초가 나이 들면서 친숙해졌다. 우선은 홀가분하게 나서는 일상에의 탈출이 좋다. 중원평야의 황금물결이 흐뭇하고 쉬엄쉬엄 감돌아 넘는 이화령 굽이굽이 산길의 가을빛이 유정하다. 거기에 고향마을 별밤의 수더분한 막걸리가 갈수록 당기면서, 어린 날의 명절처럼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이래저래 음력 팔월의 첫 주말이면 그곳에 핏줄을 댄 전국의 성인 남자들이 선산(先山)발치의 집성촌으로 집결한다. 그리하여 토요일의 한낮에는 원근의 산자락과 묏등의 예초기(刈草機)들이 여름 막바지의 말매미 떼울음인 양 앵앵거린다. 그러다가 저물녘이면 하나같이 유사(有司) 댁 사립을 들어선다.

산 밑 집성촌의 터주들과 객지의 피붙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는 문중회의다. 회의래서 무슨 절차나 격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안부인사가 끝나면 나이또래별로 사랑채와 안채, 마당의 멍석 위로 모여 앉아 함께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하는 일이었다. 천릿길을 달려와서 눈도장 하나를 찍기에는 싱거울 만한 회합이었다. 그러나 엇비슷한 연배들끼리 권하고 받아 마시기를 반복하다 보면, 삼백여 년의 세거(世居)로 아재에서 증조부까지 벌어졌던 촌수가 바깥세상 모르고 행복했던 지난 시절의 동무로 환치되는 것이었다. 조선호박 씨암탉 볶음에 인박힌 도갓집 막걸리가 촉매제일 것이었다. 거기에, 쏟아질 듯 영롱한 밤하늘의 별꽃과 박 덩굴 울밑에서 밤을 새는 풀벌레들의 목청이었을까.

나 또한 그곳의 분위기와 정취에 젖으면서, 이제는 간혹 건너뛰어도 허물될 것 없는 나이에 기다려서 찾아간다. 비슷한 흙빛의 안면들이 그곳에서 만나면 서로 고맙고 반갑다면서, 내년에도 실수 없이 만나자고 쓰다듬고 부여잡게 되는 것이었다.

정작 일요일의 문중벌초는 선산 발치에서부터였다. 어느새 키 자란 풀숲이 오랜만의 발길에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기에 마을 앞뒤 선영의 기슭 초입마다 풀 덩굴에 날이 감긴 예초기가 힘겨운 목소리로 앵앵 울어대는 것이었다.

웬만큼 올라선 등성이에서도 형편은 녹녹하지 않았다. 소 떼가 몰려 달리고 나무꾼들의 발길이 연중 이어지면서 신작로처럼 훤하던 능선 길은 간곳이 없고, 양쪽 길섶의 울울한 수목들이 가지를 섞으면서 지난 시절을 지워내고 있었다. 해마다의 행사건만 톱과 낫, 예초기로 자르고 치고 깎으면서 전투를 하듯 전진해야 했다.

정작 산소들의 벌초는 별일이 아니었다. 예초기로 벌을 깎고 낫으로 봉분을 다듬는 절차였다. 그것도 수십 명의 청년들이 대여섯 예초기로 일거에 제압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당초의 예초기 도입이 순탄하지 않았다. 닭 울음과 개 짖음까지 피해 앉은 조상님들의 유택에 기름 타는 냄새를 퍼뜨리고 쇠 날의 굉음을 들이댄다는 것은 그 발상만으로도 조상님께 불효라는 엄단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결국은 거역할 수 없는 세태의 수용으로 귀결된 일이었다.

선산 계곡과 산등을 따라 흩어졌던 벌초꾼들이 뒷산 발치의 입향조(入鄕祖) 산소로 집결하는 것은 늦은 점심나절이었다. 엊저녁의 문중회의에는 참석했지만, 자의 반 타의 반의 만류로 산길에 나서지 않았던 노인들도 이곳으로 합류한다. 집성마을의 근원인 성소의 벌초에는 후손들 모두가 참여하는 전통이어서, 고만한 기슭 길에 숨결이 가쁜 발길들까지도 예외 없는 거동이었다.

봉분의 잔디 몇 잎을 맨손으로 뜯는 미력까지 동원한 벌초가 끝나고 나면 백여 명의 후손들이 향을 살라 잔을 올리고 머리를 조아린다. 조상님의 음덕으로 올해의 벌초도 탈 없이 마쳤으며 내년에는 반드시 찾아뵈올 것을 사뢰는 경배였다. 그러나 한 해를 장담하기가 스스로 미심쩍은 노인들은 별도의 잔을 올리고 조아린다.

“할배요, 못난 손자의 잔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 같으이더.”

한복에 두루마기 아니면 육이오 참전포상의 훈장이라도 목에 건 작심의 차림들이었다. 그러고는 한 해 벌초의 마감 절차인 음복이었다.

돔배기 산적 안주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내려다보는 고향마을의 모습이 피폐하다. 지난 시절 사십여 호에 가까웠던 동네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그나마 일부는 행사 때나 불을 켜는 빈집들이다. 그러자니 아기 울음소리에 이어 초등학생들의 모습마저 사라진 지 오래면서 회갑 이전의 젊은이(?)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서 한 해가 다르게 퇴락해 간다.

객지의 젊은 일가들에 의존하다시피 하는 문중벌초 또한 마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머잖은 날에 집성촌과 함께 사라질, 그러나 무슨 대책이 있을 리 없는 시한부의 몸부림에 진배없다.

그러나 한편, 꼭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문중회의에서 초저녁에 자리를 비우며 일어서는 원로들이 “야들아, 일찍 자거라. 내일 작업이 수월찮다.”고 하면서도 유사 댁에겐 “오늘밤 저들의 주식(酒食)에는 제한을 두지 마소.”라고 당부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아직은 두 눈이 퍼런데 벌초가 무슨 대수이랴. 산지사방 객지의 너희들 핏줄의 친밀이 긴요한 게지.”라는 뜻일 터였다.

그건 정말 그럴 것이었다. 언젠가 새벽부터 장대비로 일관하는 바람에 하늘만 쳐다보다가 작파하던 날에도 어른들은 막상 벌초를 걱정하지 않았다. 불원천리 찾아온 성의만으로도 고맙다면서 마늘 접에 고추 근까지 들려 보내던 일이었다.

핏줄의 유대가 돈독하기면 하면 당신들과 마을이 없어지고 온갖 세상 다 변해도 선산벌초만은 산 아래 강물처럼 대대손손 유장하리라는 믿음인가. 아니면, 어차피 기울어진 세태를 당신들의 비애로 끝막음하려는 심중일까. 어느덧 내 나이 또한 수월찮으면서, 해마다 미심쩍고 안쓰러운 내 고향 집성촌의 문중벌초. 그러면서 문득 떠오르는 목월 선생의 구절.

-낸들 아나/ 목숨이 뭔지
이랑 짧은 돌밭머리/ 모진 뽕나무
아배요 어매요/ 받들어 모시고
皮紙 같은 얼굴들이/ 히죽히죽 웃는
경상남북도 가로질러/ 물을 모아 흐르는 낙동강- (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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