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현 고려대학교 로스쿨 교수(한국해법학회 회장)

▲ 김인현 교수
15세기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직후 항해는 상품의 이동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신대륙 발견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 점차 무역을 위한 수단으로서 항해가 사용되면서부터 안전한 항해가 목표가 됐다. 18세기에만 해도 유럽에서 출발한 배가 다시 출발항에 도착하는 확률은 70%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해 해운인들은 보험제도를 만들어 자신의 위험을 보장받기 시작했다. 19세기말 철선이 만들어지고 항해술이 더욱 발달하면서 안전한 도착은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품의 안전한 목적지 도착이 일상화된 것이다.

이제 인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정시성(定時性)을 추구하는 항해를 목표로 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컨테이너선박의 출현이 그 기폭제 역할을 담당했다. 이른바 정기선 운항의 출범이다. 대한민국도 1949년에 설립된 대한해운공사를 모태로 해 한진해운, 조양상선, 현대상선, 고려해운 등 정기선사를 키워오면서 정시성을 갖추려는 국제적인 대열에 동참했다. 1980년대부터는 정시성을 갖춘 전세계적인 정기선 운송망을 이용함으로써 우리나라가 무역대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대륙에서 출발한 상품이 정시에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함으로써 상인(화주)들은 그 상품을 전매하거나 최종 수요자에게 이윤을 붙여서 팔 수 있게 됐다. 상인들은 정시성을 갖춘 정기선운항의 장점을 더 확대해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시도하게 됐다.

정기선 운송에 대한 수요가 더 확대되자 운송인들은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방법들을 고안하게 됐다. 운송인들은 다른 정기선사의 운송망을 이용하게 됐다. 예컨대, 자신의 화주가 매주 월요일 일정항구에서 상품을 수출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선박은 격주 월요일에 출발하는 것으로 한정돼있는 경우 다른 주 월요일에 출발하는 다른 정기선사의 선박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와 같이 여러 개의 정기선사들이 모여서 얼라이언스(과거의 해운동맹과 유사)를 맺어 협업을 함으로써 정기선사는 정시성의 규모와 정도를 더 강화해 소비자들에게 더 만족스런 서비스를 제공하게 됐다.

또한 다양한 크기와 수량의 상품을 가진 수출자가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로 그 상품을 이동시키고자 하는 경우 수출자는 일일이 적합한 정기선사를 찾기가 쉽지않다. 그리해 수출자와 정기선사에 대한 정보와 know-how를 가진 복합운송주선인(freight forwarder)들이 나타나 중간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됐다. 이렇게 함으로써 수출자는 더 정확하고 빠른 운송서비스를 정기선사로부터 제공받게 됐다.

여기에 21세기 들어 성장한 택배운송이 정기선운항의 정시성에 가미되면서 이제 소비자들은 부두에 도착한 상품을 자신의 집에서 정시에 수령하게 될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 이제 우리는 오늘날 국제간의 상품거래는 정확한 시간에 출발하고 도착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정도가 됐고, 정기선운항은 국제무역의 필수요소가 됐다. 서로 다른 대륙사이에서 수입자가 원하는 시간에 규칙적으로 안전하게 그리고 저렴하게 상품을 이동시켜주기까지는 이렇듯 수세기가 걸렸다.

상법이 추구하는 가장 중심적인 이념은 상거래의 원활화에 있다. 상인들 사이의 상거래가 한번 일어날 것을 두 번, 열 번 일어나게 하면 상인들은 더 큰 이윤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상거래가 원활하게 일어나려면 상거래 자체의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 정기선운항은 바로 이러한 상품의 국제간 거래에서의 예측가능성을 무역관계자에게 제공하는 큰 기능을 해왔던 것이다. 국제무역에 관여된 사람들은 정기선에 실릴 운명의 화물이 언제 어디에 도착하는지 그 내용을 알기 때문에 신용을 가지고 상대방과 거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두 정기선운항이 제공하는 정시성 덕분이다.

한진해운발 물류대란 사태는 이렇게 인류가 수백년간 추구해 구축해온 무역거래와 해상운송에서의 예측가능성을 해치는 일대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역거래에서 생명처럼 중요한 상품의 정시도착이 대한민국의 한 정기선사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무너져버린 이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해야 하는가? 정기선 운항에서 정시성이 한 정기선사나 한 국가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시성은 무역하는 전세계 국가 상인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기본중의 기본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 세대의 것만이 아니다. 이는 수백년 동안 무역과 해운에 종사해온 선배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확립한 것이고, 또 우리 후세대들이 더 지키고 키워나가야 할 가치인 것이다.

해운의 선각자들은 예측하지 못한 일을 당할 때마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가면서 해운의 불확실성을 없애거나 줄여왔다. 유류오염사고를 줄이기 위해 이중선체(double bottom)를 만들었고, 정유사들이 유류오염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국제기금(IOPC FUND)을 만들어 기금을 갹출하고 있다. 공동해손(general average)이라는 제도도 있다. 공동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바다에 버려진 화물의 화주에 대해 공동위험체를 구성하는 선주, 다른 화주들이 십시일반으로 보상해주는 제도이다.

우리가 하루빨리 정시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 정기선사에 대한 신뢰하락 때문에 정시성에서 우수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국의 정기선사에게 우리 선사가 가진 운송망의 상당부분이 넘어갈 것이고, 우리 선사는 제3국 운송에서 운임수입을 얻던 기회도 모두 놓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현재의 정시성을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물류대란 사태의 당사자인 운송인 한진해운이 채무자로서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진해운에 현금이 없다는 것이다. 한진해운과 얼라이언스를 맺은 정기선사들은 정시성의 회복에 이해관계를 가진다. 자신들의 화물도 한진해운의 선박에 스페이스 차터 형식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화주들도 정시성의 회복에 이해관계를 가진다. 상품의 인도가 늦으면 늦을수록 손해가 더 발생하기 때문이고, 크게 보면 정시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추가적인 운송료가 발생해 상품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금융권 등 채권단도 자신들이 소유하거나 담보로 가진 선박이 하역작업을 완료후 하루속히 자신의 통제범위안에 들어와야 유리하다.

하역회사의 작업비는 회생절차가 개시된 다음에는 공익채권으로서 보호를 받는다. 회생채권으로 분류되는 기존의 하역비도 회생이 된 경우에 더 많이 배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해관계자들이 모두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양보해 하역작업이 조속히 완료되도록 하역비를 직접내거나 대납해 회생절차에서 처리되도록 해야 할 것으로 본다. 기원전부터 있어왔다는 공동해손제도의 정신을 이번 사태의 해결에도 도입하는 것이다. 하역된 상품이 수입자의 수중에 무사히 들어가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서도 이러한 정신이 발휘됐으면 한다.

나아가 앞으로 지금과 같이 자금의 부족으로 정기선사에 실린 화물이 양륙되지 않는 일이 없도록, 정기선 운항에서도 정기선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 당해항차의 상품(화물)을 모두 하역할 수 있도록 정기선사들끼리 기금을 마련해 지원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정기선사로 하여금 법정관리에 들어간 그 항차의 화물의 양륙과 인도에 발생하는 비용은 책임보험자로부터 보험금 형식으로 수령할 수 있도록 하는 보장계약의 체결을 법률로서 강제화하는 것이다. 우리 상법에 따르면 피해자(하역업자)는 책임보험자에게 자신의 손해에 대해 직접 청구가 가능하기 때문에 하역비의 지급은 보장이 돼 하역거부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난파물제거협약의 예).

한진해운의 회생절차를 관리하고 있는 파산법원은 회생절차내에서 DIP 금융을 신속하게 사용해 하역작업 및 운송물인도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지금과 같은 적극적인 입장일 것으로 보인다. 한진해운사태는 운송계약의 이행의 범주를 넘어서서 수많은 그리고 각국의 이해관계자가 개입돼 있어서 이미 운송인인 정기선사 혼자만의 해결범위를 넘어선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수세기에 걸쳐 확립한 무역에서의 정시성을 깨트리고 있는 중차대한 현상이다.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있는 흐름을 바로잡는 방향을 제시하고 조정하는 기능은 정부의 책무라고 보아야한다. 무엇보다 정부는 위 이해관계자들을 독려 및 설득하면서 학계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하루 속히 정기선 영업에서의 정시성 원칙에 기여하길 학수고대한다.(2016.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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