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불어 닥친 경기 불황에 선복 과잉이 지속되면서 유력 국적선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사태에 이르게 되는 등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해운업 장기 불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해운시황이 어려워지면 선사는 보유선박의 LTV(Loan To Value) 하락이라는 또 다른 험로가 기다리고 있다. 통상 물리적인 자산의 진부화는 정액 또는 정률 기준의 감가상각으로 진행되는 것이 보편적인데, 선박의 진부화나 가치의 변동은 사뭇 다른 환경을 갖는다. 해운업의 전통적 수입원인 운임이 갖는 높은 변동성으로 인하여 영향을 받는 선박의 가치도 급등락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기간 항로를 위주로 컨테이너선 영업을 펼쳐 온 유력 선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이와는 다른 아시아 역내 항로 중심의 여타 선사들과 컨테이너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건화물선 중심의 선사들마저 금융조달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는 것도 바로 보유선박의 가치가 저평가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저변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집약적인 해운업 특성상 거대자본을 들여야 하는 신조선 발주나 중고선 매입에 금융조달은 불가피하며, 어렵게 금융을 일으켜 도입한 선박은 부채를 상환하기까지 담보가치를 지속적이고 정기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선박가치평가(Ship Valuation)이다. 선박가치평가를 통해 선사는 보유한 선박에 대한 자산 가치를 스스로 관리할 필요가 있고, 대출을 제공한 선박금융기관은 정기적으로 해당 선박에 대한 LTV를 관리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국적선사들이 선박가치평가를 받기 위해 이제껏 그 수수료를 외화로 해외에 지출해 왔다는 점이다. 공적 수출신용기관(ECA: Export Credit Agency)이라 할 수 있는 정책금융기관은 물론, 여타 선박금융 기관들마저 대출을 제공한 선사에 대해 해외 해운중개업체를 통한 선박가치평가를 권고하고 있다. 소위 Approved Shipbroker로 등재된 해운중개업체들이 발행한 선박가치평가서만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런던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 위치한 글로벌 10대 해운중개업체들이다.

국내에도 전문성과 경험을 갖추고 선박매매(Sales & Purchase)를 전문으로 하는 해운중개업체들이 있음에도 굳이 해외 업체로부터 선박가치평가를 받도록 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국내 업체들이 국적선사들과의 유대관계를 의식해서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해외 업체가 제 3자의 관점에서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또한 유럽의 해운중개업체들이 일찍부터 선박가치평가와 같은 지식서비스를 제공해 온 데에도 이유가 있다. 그러나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선박매매전문 S&P 중개업체라면 한중일 조선소와 해외 선주들을 상대로 신조 발주와 중고선 매매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해외 업체의 평가가 보다 공정할 것이라는 가정도 현실과는 다를 수 있다. 무엇보다 해외 업체가 제공하는 한 장의 서류에 표기된 선박가치평가서를 받으면서 USD1,000 이상의 외화를 지불하는데다, 선가의 배경이 되는 어떠한 추가적인 설명도 제공받지 못하면서 시장에 대한 통찰과 전망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계속해서 해외 업체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 고질적인 문제다.

선박가치평가는 사실상 대상 선박의 상업적 가치, 즉 시장가격(Market Price)을 매기는 작업이다. 따라서 시대적 배경과 시장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동될 수 있으며, 또 이러한 이유로 항상 적용될 수 있는 일정한 산식이나 공식이 존재하기 어렵다. 초창기 선박가치평가와 관련한 문헌을 통해 제시된 Grey Theory에 기반한 중고선가 예측이나 L자형 경기 침체를 가정하여 잉여현금흐름을 가중평균자본비용(WACC: Weighted Average Capital Cost)으로 할인한 LTAV(Loan To Asset Value) 등 다양한 방법론이 제시되어 왔으나, 항상 시장상황에 적합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본지를 통해 이미 수차례 제시했던 바와 같이 준거 가치, 대체비용평가, 수익률가치, 평균추정가치 등 다양한 방법론을 검토한 후 결합하여 평가시점의 시황을 반영한 선박가치평가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원가법을 적용한 감가상각, 거래사례비교를 통한 동일 선령의 동 선형 최근 성약가격, 해당 선박에 투입되는 시장의 운임과 시황에 따른 수익 검토, 청산을 가정할 경우 해당시점의 해체가격(Scrap Price)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를 감안하여 분석한 후에 최종선가를 부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과정에 이용되는 데이터와 정보가 바로 선가를 설명하는 근거들이 된다.

해운거래정보센터는 지난해부터 정책금융기관과 일부 선사를 대상으로 선박가치평가를 수행해오고 있다. 해양수산부와 부산광역시의 예산지원을 통해 대상에 따라 기존 해외업체들에게 지불하던 수수료의 50% 이하로 선박가치평가서를 발행하고 해당 선박의 가치 부여에 대한 시황정보와 근거를 사전검토결과로 제공해왔다. 경우에 따라서 해당 선박의 사업성 또는 경제성 분석 컨설팅을 별도로 제공하고 있다. 국적선사는 물론 국내외 해운거래주체들과 거래관계에
있지 않고, 정부의 예산으로 사업을 집행하므로 공공성과 객관성을 보장받을 수 있으며, 해운시황 리서치를 바탕으로 한 전문성과 선박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국내외 S&P 패널리스트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해외의 해운중개업체들에게 선박가치평가를 맡겨야 할 이유가 없다. 이는 해운업계와 금융업계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해운금융포럼에서도 이미 소개된 바 있고, 선박금융기관에서조차 외화유출을 막고 해외 해운중개업체들에 대한 리
서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도 기존의 업체리스트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얻기도 했다.

선사가 바라는 장기적 안목의 전략적 선대운용과 선박금융기관이 바라는 안정적인 LTV 유지를 위해서는 선박가치평가가 필요한 시점에만 불특정 해외업체에 의뢰하는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된다. 글자 그대로 선박의 전 수명주기(Life Cycle)에 걸쳐서 정기적인 가치평가가 가능하도록 기초데이터와 선가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그 평가가 객관성과 타당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선종별 선형별 시황정보가 뒷받침될 수 있도록 선박투자관리기반이 구축되어야 한다. Clarkson이 모태가 되어 자회사인 Seasure로 하여금 이러한 작업을 먼저 시작한 Vessels Value가 기존의 선박가치평가를 정보서비스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공격적인 글로벌 영업에 나서고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나라 선박금융기관들과 각 조선소에 있는 리서치부문이 함께 힘을 모은다면 국내외 S&P 패널리스트들과의 협업을 통해 전 세계 바다를 누비고 있는 약 25,000척 가량의 상선들에 대한 DB 구축과 이력관리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 선사들이 불황기에 저가로 선박을 매입하고 호황기에 고가로 매각하는 세련된 Asset Play를 펼치며 선박투자의 선순환구조를 앞당기기 위해서도 선박가치평가가 단순히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서도 안 되고 더 이상 해외에 의존해서도 안될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