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상선 김문호 사장/제10회 해양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 한일상선 김문호 사장
선장으로 첫 발령을 받은 코리아 퍼시픽 호의 포항/호주 간 항로가 평온했다. 남방 항해의 초입인 필리핀 동쪽의 서태평양 언저리가 태풍의 발생지여서 해면이 자못 소란스럽긴 하지만, 아직 유년기의 바람들이 6만여 톤 대형선의 항로를 간섭하지는 못 했다. 그나마 기껏 사흘을 항해하면 바로 적도무풍대(Doldrums)였다.

북위 10도선과 남위 10도선 사이로 통칭되는 적도무풍대의 1300여 해리를 남하한 다음에야 산호해의 물결이었다. 연중 무역동풍에 길들여진 해면은 미미한 바람에도 가당찮은 기세로 부딪쳐 왔다. 더구나 항해에 치명적인 측면 파동이었다. 그러나 이내 호주의 동쪽 연안으로 접근하는 단거리 항로여서, 웬만한 황천(荒天)에는 간단한 지그재그 항해로도 무난한 뱃길이었다.

하긴 유명한 윌리윌리가 바로 이 해역의 바람이었다. 사모아, 피지 인근의 남태평양에서 발생하여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성장하는 열대저기압이었다. 태풍, 허리케인, 사이클론과 함께 지표상 4대 바닷바람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항해기상학의 구색일 뿐, 윌리윌리의 기세가 다른 세 바람의 반열은 못 되는 것 같았다. 그간 서너 항차를 오르내린 경험과 근자에 보고된 피해사례들이 그랬다. 2차 세계대전 중 롬멜 군단의 전차를 뒤엎었다는 사하라사막의 지부티 바람이 지금은 이름뿐이듯.

그야말로 듬직하고 쾌적한 선체에 평온한 항로였다. 웃통을 벗어젖힌 반바지 차림의 새벽 갑판 산책은 넘치는 활성오존으로 상쾌했다. 뒤이어 찬란한 일출과 함께 열리는 하늘, 바다, 산호초의 경이는 새로운 하루의 축복이었다. 그러다가 태양이 남중하는 나절이면 노곤한 피로 속의 산뜻한 오수(午睡). 그렇게 하루가 저무는 일몰에는 보일락 말락 피어나는 붙박이별들을 막 숨으려는 수평선으로 끌어내려 고도를 체크하는 천측(天測). 그것은 망망대해에서의 위치 확인인 동시에 뒤이어 전개될 별꽃의 향연 속으로 하루를 잠재우는 보람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진입한 산호해였다. 점심식사 후에 주갑판으로 나섰더니 파도의 주기와 감도가 심상찮았다. 좌현 열 시 방향 2백 해리쯤의 기상도 위에 황소 눈알처럼 앉은 열대저기압, 바로 윌리윌리였다. 느리게 서진하고 있는 그것의 동태와 거리로 봐서 우리의 남진항해는 무난할 것 같았다. 다년간 그것들의 궤적을 붉은 실선으로 집계한 종합기상도(Weather Chart)에서도 실타래가 호주 북단의 토레스(Torres)해협 쪽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기껏 두 가닥의 붉은 머리칼이 호주 동해안을 따라 흘러내릴 뿐이었다.

밤중 내내 해면이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피차의 최 근접 점을 통과하고 나면 바로 호전되리라 했다. 그러나 날이 새면서 판명된 사태는 그것이 아니었다. 중심기압을 흠씬 낮춘 그것의 눈이 일곱 시 방향 약 100해리 해상에서 배의 항로와 비슷한 진로로 따라오고 있었다. 백분지일이나 될까 말까한 확률이긴 하지만 그것의 좌회전 남하가 사실이라면 따라잡힐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이 호주 동해안으로 상륙할 여지도 있었고, 설사 따라잡혀 봤자 윌리윌리일 뿐이라는 각오로 항진하는 도리밖엔 없었다. 왼쪽은 그것의 진로 전방이었고 오른쪽은 바로 대보초의 산호초 밭이었다. 목적 항 뉴캐슬까지 이틀 남짓을 남긴 항정이었다.

정오를 지나면서 동풍에 실린 물결이 파고를 높여 가고 있었다. 자동조타(自動操舵)를 해제하고 수동 조타의 지그재그 항해로 전환했다. 보조 타수(舵手)들을 동원하면서 선장이 조타명령을 내리는 비상항해로 돌입한 것이었다.

바람과 빗줄기와 물결이 시시각각 강도와 크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거대한 군마들의 횡대가 갈퀴를 휘날리며 연거푸 좌측으로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일몰 경에는 침로 항해를 포기해야 했다 지그재그 행보일망정 선체의 횡요(橫搖)가 과도했다. 물결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버티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피항(避航)조치였다. 파도를 선수로 받으면서 바다로 나갔다가 되돌아서 육지 쪽으로 들어오는 능파(凌波)항해였다. 엔진과 방향타가 버티는 한 항해야 무난하겠지만 한 번씩 돌아설 때가 문제였다. 간혹 섬멸하는 번갯불 말고는 완벽한 흑암의 세계에서 선체가 파도고랑에 눕는 매 순간이 바로 운명의 순간들이었다.

희붐하게 날이 새자, 천지는 경악이라는 말밖에 달리는 표현할 수 없는 정경이었다. 지금껏 보아 온 바다는 간곳이 없고 겹겹의 준령들이 하늘에 삿대질을 하듯 치솟으며 몰려들었다. 하늘 또한 이에 질세라, 오늘은 아예 태양이 없다는 듯 캄캄하게 내려앉은 채, 벽력의 뇌성과 폭우의 물 폭탄으로 받아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귀청을 찢는 바람 소리는 마스트와 안테나로 사납게 감겨들었다. 태초의 혼돈인들 이에 더했을까 싶었다.

준령이 달려들 때마다 하늘로 솟구쳤던 뱃머리가 우레 같은 파열음과 함께 해면으로 처박히면 선수부위가 떨어져 나간 듯 모습을 감추었다. 이윽고 거대한 바다를 잔뜩 뒤집어쓴 선수갑판이 덜덜덜 떨면서 솟아오르면 주갑판의 거대한 물결이 후부갑판으로 넘쳐들었다.

들고 나는 변침 시, 가련한 선체가 좁고 긴 풀잎처럼 파도 골짜기에 누울 때면 좌우현의 파도 꼭대기가 조타실의 내 안고를 오르내렸다. 그러면서 선체는 매 번이 마지막이듯 뒹굴었다. 갑판의 양단이 물에 잠기는, 대략 45도 부근의 횡요가 선체 복원력의 한계라고 하지만, 우리의 코리아 퍼시픽 호는 이미 그 한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파도가 포물선의 파동이라는 물리학의 명제만이 마지막 보루인 셈이었다. 더욱 가공할 일은, 병든 방아깨비처럼 해면을 찧고 뒤틀리며 흐릿한 시계 속을 통과하던 이웃 배의 모습이었다. 선수가 솟아오르자, 앞쪽 절반 이상의 선저판 아래로 하늘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타고 있어서 보이지 않을 뿐, 우리 쪽의 정황도 그에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난신호의 단파 주파수대에는 SOS의 모올스 부호들이 다급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항공기 구조요망(Save us by plane)!"

"절망적임, 헬리콥터 파견요망(Desperate, send us copter)"

그러나 호주 북단 다윈에 위치한 구조본부의 대답은 딱 하나였다.

“황천으로 비행불가, 최선을 다하기 바람.(Weather not permit, do your best)"

자기들끼리의 일상이라면 기침만 해도 거들고 나설 “신의 가호가 있기를(God bless you)!"의 호의는 끝내 따라붙지 않았다.

그들과 내가 아득하게 멀다는 소외감과 함께 뜨거운 절망의 기운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그러면서 코흘리개 두 아들이 떠올랐다. 이제 영락없는 ‘슈즈 샤인(Shoes shine)’이 되는구나 하면서 불쌍했다. 그러고는 나의 비보에 혼절할 것만 같은 아내가 못 미더웠다. 그런 한참 후에야 나로 인한 슬픔으로 여생을 젖어 지내실 부모님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났다. 그러고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덤덤했다. 대신 나도 몰래 두 손바닥을 붙이면서 고개를 조아리게 되는 것이었다.

“당신의 권능과 판정에 승복합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가랑잎만도 못한 재능이긴 하지만, 그래도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만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가증스럽더라도 용서하소서.”

절에도, 교회에도 다니지 않는 나의 기도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면서 어린애처럼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담담해지면서 시야가 트여왔다. 여럿 선원들이 조타실 주위로 몰려와 있었다. 육십 평생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낸 갑판장의 핼쑥한 안색도 기껏 자식 연배인 내 표정을 살피는 눈치였다.

별생각 없이 시작한 선장의 직책이 이것인가 하면서 뜨끔한 각성이 치솟았다.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죽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선장으로 죽어야 한다는 명제만이 전부였다. 해도대(海圖臺) 위에 상체를 엎은 채 숨을 고르고 있는 내게 해양대학의 한참 선배인 기관장이 은밀하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이제는 선원 각자에게 스스로의 생명을 책임질 권리를 분배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라이프 재킷을 나누어주고 조난신호를 송출하는 것이 선장의 마지막 본분이 아니겠느냐는 조언 내지 자기 몫의 권리주장일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내가 목청을 돋우었다.

“여기는 당신의 자리가 아니야, 기관실로 내려가시오!”

그러고는 다른 선원들에게도 일갈했다.

“요만한 파도에 웬 법석들이야? 지체 없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도록!”

정말이지 이만한 위기에 그들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나도 몰랐지만, 조난신호나 구명조끼로 대처할 사태는 한참 지났다는 판단이었다. 그것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선원들을 공포의 혼란 속으로 몰아넣을, 선장인 나로서는 끝내 열고 싶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 것이었다.

이튿날의 정오쯤에는 태풍의 눈, 바로 윌리윌리의 저기압 중심이었다. 극도로 떨어진 기압계가 하강을 멈추고 바람이 수시로 바뀌면서 파도가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러나 중심부의 상승기류로 바다가 거대한 가마솥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파도의 정수리마다 하얀 이빨을 드러낸 채 하하하하 웃으면서 달려드는 귀신의 형상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윌리윌리가 나와 선원들을 자신의 소용돌이에 가두고 이제는 섬멸하려는 마지막 절차인가 싶었다. 거기에 음산하도록 짙은 안개였다. 시정(視程)이 백 미터나 될까 말까한 농무 속에서 레이더Radar)만이 유일의 길 더듬이였다. 이만한 비바람에도 실수 없이 작동하는 그것이 미덥고 고마웠다.

우현 쪽의 안개를 뚫고 유령처럼 나타난 잡화선 한 척이 스칠 듯 근거리를 느릿느릿 지나갔다. 만재흘수선까지 바다에 잠긴 검은 선체를 불 맞은 구렁이처럼 뒤척이며 지나치더니 취객의 뒷모습으로 비틀비틀 안개 속으로 묻혀 갔다. 그 배에서도 레이더 스캐너가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음 날은 한결 높아진 파도였다. 그러나 파장이 길게 늘어난 너울성이어서 항해가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여전히 낮게 드리워진 하늘에서 빗줄기가 세찰 뿐, 뇌성이나 벽력은 없었다. 그러나 돌풍은 여전히 높은 스케일을 견지하고 있었다. 윌리윌리가 우리를 앞질러가서 사라진, 저기압 후면 기상(氣象)의 징후들이었다.

그것이 휩쓸고 간 바다를 패잔병처럼 비척이며 찾아간 뉴캐슬 항에서도 입항은 허용되지 않았다. 항만시설들이 거반 파괴된 데다, 예선 등 입항보조선들의 출입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외항에 닻을 내리고 기다리며 쉴 수도 없었다. 산처럼 밀려드는 너울들이 닻과 닻줄을 자꾸 들어올리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선수로 물결을 가르면서 지향 없이 배회할 밖엔. 바람도 거의 멎었지만 뒤풀이의 장대비는 연일을 두고 쏟아졌다.

뿌리째 뽑힌 나무며 건물의 잔해, 돼지새끼까지 휩싸인 각종의 농축산물들이 강을 타고 포구로 밀려들고 있었다. 40년래의 대형 윌리윌리에 4척의 외항선이 가라앉았다는 방송이었다. 입항수로의 오른편 언덕 위에는 2만 톤쯤의 배 한 척이 그날의 증언인 양 전신을 드러낸 채 덩그렇게 올라앉아 있었다.

고갈에 직면한 생활용수를 빗물로 보충하면서 또 며칠을 기진맥진한 끝에야 드디어 입항이었다. 검역, 세관, 출입국, 대리점들이 자기네 편의대로 승선하면서 나와 선원들의 난항에 대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들과 내가 전혀 무관하다는 일념뿐, 그들의 건성이 공허하기만 했다.

기관장과 통신국장의 권유로 따라나선 부둣가의 주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캡틴, 수고가 컸습니다.” 라는 관용구는 침묵만도 못하게 귓전에서 흩어졌다. 같이 마시면서도 자기들끼리 취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고역이었다. 함께 배로 돌아와서 두 사람을 침실로 따돌리고는 다시 호텔의 주점으로 나가 앉았다.

이튿날, 호텔방에서 눈을 뜬 것은 오후 다섯 시경이었다. 배에서는 선장이 없어졌다고 소동이었다지만 나로서도 도리 없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에야 조금씩 돌아오는 선장의 직책이며 일상이었다. 지금은 항구의 부두에 접안중이며, 하역시설의 파괴로 당분간은 선적작업이 없다는 것. 그러고는 부산의 집과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전화를 걸어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 모두가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나와 배는 가라앉고 없는데 내 영혼만이 저승도, 이승의 고향 산천도 아닌 객지의 구천을 이렇게 감돌고 있는가 싶었다. 하룻강아지의 무지와 미숙으로 바다를 한 꺼풀씩 익혀가던 서른두 살 때의 일이었다.(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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