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내 나이 望九

파란만장의 2017년, 내 나이 望九망구이었다.

90세를 바라본다하여 81세를 望九라 한다. 눈은 아물거리고 귀는 먹먹하고 정신은 혼미한데 아홉 계단을 더 올라가려니 막막하다. 곧이어 허리는 꾸부정하고 걸음걸이는 휘뚝거릴 노추老醜의 내 모습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제아무리 절제하고 몸을 정갈하게 가꾼다한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자연의 순리인데 어찌하랴! 백세시대라고 기염을 토하지만, 영웅호걸들이 천년만년 살듯 기고만장했으나 환상이었다.

120세 시대가 다가온다고들 하다.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 3D와 나노 등을 수단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에 속속들이 들추어질 투명인간에게 생명의 신비와 인격의 존엄이 있을까.

노동의 고통과 땀이 삶의 가치인데… 남의 손에 의지하여 연명하는 것이 Well Being일까? 120세 장수는 부자들의 차지이겠지. 빈부 양극화가 수명壽命의 양극화로 번진다면 또 다른 문제가 세상을 뿌리 채 흐트러뜨릴 터인데.

내 인생 80을 되돌아보면 분에 넘치는 은총이다. 일제식민 치하에서 인명과 재산을 잃어 집안은 퇴락됐다. 해방 이후 좌우갈등과 6‧26전쟁으로 가정은 끝내 해체됐다.

고향집! 앞뜰 뒤뜰은 철따라 색깔이 바뀌고 과일은 주렁주렁 열렸다. 육남매 막둥이로 조부모님과 부모님과 형 누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고향집을 꿈엔들 잊으랴! 고향집을 회상하면 나는 지금도 철부지 어린이가 된다.

꺾기지 않고 살아남아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었다. 나랏일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여 이곳저곳 대학원들에서 갈증을 풀었다. 은퇴하고선 체험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는 내 자신을 되돌아봐야겠다고 수필교실을 찾아 문학적 소양과 기법을 익혀 문단에 등단했다.

내 나이 望九에 최후의 만찬인양 내 잔이 넘치도록 성찬盛饌이 차려졌다.

첫째, 한국해운신문에 게재했던 글들을 다듬어<人生은 지구별 航行이다>란 수상록을 정초에 발간했다. 인연을 맺었던 분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수상록을 보내드렸다.

둘째, 5월 2일 국제PEN클럽 회원증을 받았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모윤숙 시인의<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란 시를 읽고서 시인을 흠모하고 PEN을 동경했다. 65년을 지나 그 동경이 성취됐다. 더욱이 9월 1일 PEN이 한영대역韓英對譯 대표작 선집을 발행했다. 그기에 내 글이 한글과 영어로 게재되어 나에겐 영광의 면류관이었다.

셋째, 생전에 받았으면 했는데 5세대 이메일을 3월 12일 받았다. 미국에서 태어나 유치원에 다니는 셋째손녀 다함이의 이메일이다. 아들이 1세대, 며느리가 2세대, 첫째손녀 3세대, 둘째손녀 4세대, 이렇게 21년 만에 다함의 5세대 이메일로 이어졌다. 다이아몬드가 5세대 이메일보다 영롱할까!

넷째, 첫째손녀 다슬이가 고등학교 방송앵커로 발탁되어 방송을 진행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9월 26일 보내왔다. 한국에서 초등하교 4개월을 다니다 미국으로 가 영어를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었는데 능란하게 방송을 진행하다니!!! 대학입학을 위한 SAT성적이 최상급이라는 희소식도 곁들었다. 이 할아버지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다섯째, 중학생이 된 둘째손녀 다해가 Build-on클럽에 가입했다고 10월 2일 이메일이 왔다. 클럽 친구들과 복지시설에서 노인들과 함께 놀이를 하며 노년의 외로움을 달래드린다고 했다. 이런 반가운 소식이 또 있을까.

여섯째, 11월 11일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과 나눔의 실천으로 30년 동안「성 라자로 마을」한센인 가족들을 도와주심에 감사를 드린다’는 수원교구장님의 감사장을 받았다. 한센인과 밥을 먹고 술잔을 나누었다. 신부님을 수행해 해마다 중국, 월남, 인도, 캄보디아, 네팔로 갔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한센인의 뭉그러진 손발을 어루만졌다.

일곱째, 데레사 말가리다 수녀님께서 사회와 등진 봉쇄 수녀원 가르멜에서 기도와 노동으로 59년간 수도하시다 11월 18일 향년 86세로 선종하셨다. 번뇌와 병고를 내려놓고 당신 품으로 돌아가신 수녀님께 ‘영원한 빛을 주소서!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라고 위령기도를 드렸다. 25년간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수녀님이시다. 수녀님께서 나를 앞서 떠나셔 내 마음에 눈물보다 은은한 미소가 흘렀다.

인생살이가 희로애락喜怒哀樂인데 내 望九의 성찬에 기쁨과 즐거움만 있었으랴! 노여움과 슬픔으로 잠 못 이뤄 밤들을 지새웠다. 아파했던 일일랑 흘려보내고 기뻐했던 일들만 가슴에 담아두련다.

‘본인은 사망 후 의학발전을 위하여 아무조건 없이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내 시신을 기증하겠습니다’라고 시신등록을 했다. 이제 남은 건 Well Dying이다. 이를 위한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