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호(한일상선 사장)

-아프리카의 최고봉 킬리만자로, 마사이 어로 신의 집이라고 불리는 서쪽 봉우리 근처에는 말라 얼어붙은 한 마리의 표범 시체가 있다. 도대체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설명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쪽 세상에서도 사냥, 낚시, 탐험, 등 야성의 도락으로 여전히 분망하고 강건하신지요. 선생님이 누워계신 그곳 로키 산록의 아이다호로부터 17시간의 경도만큼 동쪽 나라의 서생 문학도가 혹여 작폐라도 되지 않을 까 망설이면서 감히 인사 올립니다.

“여보게들, 일어나 앉지 못해서 미안하네.”라고 전하는 선생님의 자작 묘비명 때문입니다. 일어나실 필요 없습니다. 북이탈리아 전선의 포탄 부상으로 밀라노 육군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그때처럼 편하게 누우셔서 동방서생의 치졸한 호기심에 죽비의 경종이라도 내려주신다면 더없이 감사하겠습니다.

답: 정 그러시다면 기왕지사 남의 잠은 깨워놨으니 어디 한 번 들어봅시다.

문: 여전히 ‘비정(非情)의 문체’ 그대로의 어투시군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아마도 선생님의 경우를 두고 생긴 경구인가 합니다. 선생님이 가신 지 어언 쉰다섯 해가 되는 지금도 우리 동방(東邦)의 서가에는 선생님의 옥저들이 여전히 앞자리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답: 에끼 여보시오! 올해로 4백 주기가 되는 셰익스피어며 세르반테스, 2천 년도 더 넘는 호머 같은 대가 선배들을 두고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요? 아무리 동양적인 예의라 하더라도 너무나 지나친 아부잖소. 아 참, 호메로스를 호머라고 말한 점은 양해하시오. 카이사르를 시저로, 미켈란젤로를 마이클 안젤로스로 부르는 것은 영어문화권의 횡포임을 인정하고 사과하오.

문: 저 또한 앞으로는 격식 없이 진솔한 말씀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선생님의 문학세계를 “헤밍웨이적인 허무주의를 그만의 ‘비정의 문체’로 풀어내는 작업”이라고 통칭하는 것 같습니다. 저로서도 이에 거역할 이치는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 특이한 것은 선생님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남녀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우연히 말려드는 이성과의 사랑에 전신을 던지면서 비극적 종말을 잉태시킨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피조 인간의 숙명이며 한계니, 니힐리즘의 극치라는 등의 각론들이 따라붙는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후자의 각론들에 전적으로 동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생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독자들을 운명이니 허무의 골짜기로 안내하긴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계곡의 초입에서 탈피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을 나서면서 호텔 쪽 빗길을 걷는 ‘무기여 잘 ....’의 헨리도, 말에서 떨어진 그 자리에서 최후를 준비하는 ‘누구를 위하여...’의 주인공에게도 절망이나 비통의 그림자는 없습니다. 자신의 시신을 기다리는 하이에나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죽어 가는 ‘킬리만자로의 눈’의 해리조차도 죽음의 고통이야 자신이 개의치 않는 한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태연하거든요. 마치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통달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영혼은 친구가 조종하는 2인승 단엽기를 타고 마사이 족들이 ‘신의 집’이라고 부르는 킬리만자로 정상의 서벽 분화구, 더없이 맑고 넓은 눈의 세계로 아주 유쾌하게 진입하잖아요? 그간 수많은 여인들을 농간하고 우정의 신의를 짓밟았던 생전의 업보와는 전혀 무관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선생님의 문학세계를 소위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예기’ 쯤으로 보고 싶은데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답: 집어치우시오. 그딴 것을 작가에게 묻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잔인박행이오. 책방에서 책을 사면 당신의 것이듯, 당신이 읽은 이야기 또한 당신만의 것이오.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해부하고 잘라내고 하는 거요? 흙 한 삼태기 바다로 쓸려나가는 것도, 잔잔한 바람결에 나뭇잎 하나 소리 없이 지는 것도 다 당신을 향해 울리는 조종(弔鐘)이라고 내 진작 암시하지 않았소? 당신이야말로 지구 공동체의 일원이자 주인이기 때문이오.

문: 선생님의 ‘노인과 바다’를 지극히 간접적으로나마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선생님이 유명(幽明)을 바꾸시던 바로 전 해의 4월에 저희 동방에서는 소위 학생혁명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두에 섰던 대학생들이 시대의 주역인 양 세상을 활보했지요. 도청소재지의 그들이 시국 강연이니, 무슨 연설회니 하면서 읍내로 내려오면 우리들 중, 고등학생들은 어느 초등학교의 맨바닥 운동장으로 모여 앉아야 했습니다. 그때 단상의 연사들이 자유, 정의, 인간정신 등, 알아듣지 못할 단어들을 나열하면서 선생님의 구절 “인간은 패배한다. 그러나 굴복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를 웅변하곤 했습니다. 그때 저로서는 뭔지 잘 모르면서도 참 멋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한참 뒤의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는 선생님의 ‘노인과 바다’ 영문판을 겁 없이 사들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향집으로 들어박혔습니다. 당초 어림없는 영어실력이기도 했지만, 이야기 초입의 스페인어 ‘La mar', 'El mar'가 당시의 민중서관 판 영한사전으로는 해독되지 않았습니다. 전후 문맥상 전자는 양순한 것이고 후자는 사악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넘어갈 밖에요.

그렇게 접한 선생님의 영문판 옥저를 그 뒤 해를 두고 네댓 번 통독하면서 조금씩 증가되는 감흥으로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쉰 살쯤에서 그간 잊어버린 영어단어라도 이삭 주울 수 있을까 하면서 펄 벅 여사의 ‘Letter from Peking' 등과 함께 읽었을 때는, 명쾌 단순하면서 서정적 산문시라 할 만큼 아름다운 선생님의 문체를 우리의 글로 옮겨보고 싶다는, 가당찮은 만용이 질정 없이 치솟았습니다. 그래서 각박한 직장생활 간간의 일 년여를 홀린 듯 들떠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노인과 바다’가 이전의 소설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 같습니다. 그들과 줄거리의 궤를 같이하자면, 기진맥진 오두막으로 돌아온 산티아고 노인이 헤어나지 못할 잠 속으로 녹아떨어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야 될 것 같거든요. 수시 따라붙는 사자 꿈이야 꾸든 말든 말이지요. 그런데도 노인은 마놀린 소년의 정성으로 깨어나서 활기를 되찾잖아요. 고물 포드자동차의 스프링을 여러 번 담금질하고 갈아서 제대로 된 창을 만들어야 된다는 의욕과 함께 말이에요. 그야말로 재생 내지 부활이 아닐 런지요. 게다가 불 꺼진 포구로 돌아온 노인이 돛대를 메고 언덕을 오르는 장면이 2천 년 전 골고다언덕의 어느 정황과 흡사하게 겹쳐진단 말입니다.

12년의 구상과 소위 ‘비정의(Hard boiled) 문체'로 2백 번이나 고쳐 쓰셨다는 ’노인과 바다‘는 선생님의 문학세계를 망라하는 최후의 자전적 구원 소설이 아닐 런지요? 그래서 바로 이 옥저로 받으신 노벨상의 메달을 쿠바 수호성인의 성소에 바치셨고요. 마치 소설 속의 노인이 큰 고기를 잡게 되면 그곳을 순례하겠다고 기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두고 인간 정신의 존엄성이니, 불굴의 의지라느니 니힐리즘의 극치라는 단평들이 아무래도 미흡해 보입니다.

답: 남의 글을 읽어도 독하게 읽었구려. 그러나 나로서는 진작 “내가 가진 능력으로 내가 쓸 수 있는 최선의 작품”이라고 떠벌여놨으니 더는 뭐라 할 말이 없소. 시쳇말로 NCND라고나 합시다.

문: 선생님은 기자 겸 소설가로서의 본업(?) 외에 낚시, 사냥, 권투, 수영, 투우 등 야성적 스포츠와 모험의 애호가로서 두 번의 세계대전과 여럿 지역분쟁에 자유와 정의의 양심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시의 거금 4만 달러를 쾌척하면서 조지 오웰과 함께 스페인 내전의 정부군을 돕고 나섰던 일은 지루한 세간의 신선한 충격이었지요. 그러면서 선생님은 ‘행동하는 지성’의 전범이셨고요.

답: 典範인지 戰犯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때 정부군의 패배로 프랑코의 36년 독재가 대두된 일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오. 이사벨라 여왕과 콜럼버스, 세르반테스에 고야, 피카소의, 태양과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 그로 인해 유럽의 쑥대밭으로 변해버렸거든요. 호기심 하나로 평생을 지낸 내가 뒤돌아보는 일이 드물지만, 바로 그 회상만은 이쪽 세상에 누워서도 가슴이 아린다오.

문: 그래서 선생님은 전 미 작가회의에서 “훌륭한 작가의 출현을 막는 유일의 정체는 바로 파시즘”이라고 역설하셨군요. 그리고 그 36년이라는 시간의 의미가 저에게도 심상치는 않습니다. 우리의 동방에도 그만한 시간을 이웃 외세에 시달리면서 역사의 중단 내지 퇴행을 겪은 바 있습니다. 옛 중국의 지성 또한 서책을 불사르고 선비들을 생매장한 진나라 시황제의 제위BC247-BC211) 36년을 음력의 윤달처럼 윤위(閏位)로 정리 했다고 읽었습니다. 어쩌면 36년이란 것이 어느 한 인간의 광기 내지 사상이나 고집의 수명에 해당하는 기간일 런지요.

선생님이 한때 머무셨던 남부 스페인의 ‘론다(로마시대의 아룬다)’ 시와 그 일원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깊고 넓은 협곡의 절벽 꼭대기를 돌아 ‘누에보 다리’로 연결되는, 기껏 5백여 미터의 오솔길에 ‘헤밍웨이 산책길’이라는 팻말 하나를 볼품없이 세워놓은 농촌 마을이 이를 보러온 외래 관광객들로 붐볐습니다. 선생님은 저쪽세상에서도 여전히 스페인을 사랑하며 돕고 계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근의 ‘시에라네바다’의 산록도, 햇살 밝은 지중해의 연안도 못되는 한촌을 거처로 정하신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론다가 스페인 투우의 발상지이며 스페인 최고 전통의 투우장이 그곳에 있다는 해설을 들으면서 실소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못 말릴 선생님의 호기심이라면서 말입니다. 하긴 선생님께선 투우에의 애호를 넘는 깊은 연구로 투우의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까지도 발표하셨다더군요.

선생님의 마지막 총기사고는 말 그대로 우발이었는지 아니면 자의였는지요? 당시의 도구가 선생님이 열 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과 같은 사냥엽총이었고, 선생님의 아버지 또한 선생님과 똑같은 사고(?)로 일생을 마감했기에 세간의 관심이 더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의 탄생과 최후가 같은 7월이었기에 상상의 개연성까지도 보태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두 명의 하우스보이, 세 명의 정원사, 자동차운전수와 중국인 요리사에 필라 호 요트 운전수, 20마리의 고양이와 8마리의 개까지, 쿠바에서의 풍요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귀환한 지 꼭 삼년 만이었습니다.

답: 그건 나도 모르오. 설사 우발적 사고라 하더라도 그때의 엽총이 장전되지 않았거나 장전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방아쇠가 풀려있지 않았다면 어찌 되겠소?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물어봅시다. 햇빛에 눈이 부신 나머지 방아쇠를 당겨버렸다는 ,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의 격발은 도대체 어느 쪽이오? 그리고 선생, 내가 네 명의 아내를 만났듯 선생 또한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 그녀밖에 보이지 않는 사랑에 빠졌다면 그건 선생의 자의요, 우발이요? 그런 것들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표리가 각각인 듯하지만, 실은 하나인 것이오. 그걸 굳이 표현하자면 운명 내지 당신들 동양의 인연이겠지요. 그러므로 내 아버지의 경우가 우발이라면 나도 그럴 것이고, 아버지가 아니라면 나도 아닐 것이오.

문: 아버님에 대한 선생님의 애정은 짐작할 만합니다. 선생님이 세 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섯 남매의 둘째이자 맏이들인 선생님을 서로 자기편으로 키우기 위해 선생님의 환심에 공을 들였다면서요? 문명적이고 교양이 높은 어머니는 첼로를 권하는 반면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아버지는 낚시를 권했을 때, 선생님은 낚시를 잡으면서 어머니에게 슬픔을 안겨드렸고요.

▲ 김문호
답: 별걸 다 들추시오. 사실 그때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였소. 그러면서도 왠지 늠름한 아버지가 맘에 들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로부터 나의 삶은 어머니의 슬픔을 완벽하게 외면한 채 아버지 쪽 일변도였소. 그때 나에 대한 아버지의 가르침은 호기심과 모험만을 사랑하며 살라는 단 하나였소. 자칫 그것 밖으로 한눈을 팔다가 세상이 무미 단조로워지면 사는 것이 끝장이라는 것이었소. 그래서 나도 그때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아버지처럼 살려고 노력했소. 그러나 그것이 포탄부상에 자동차사고, 우간다 밀림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만신이 창이가 되면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소. 아무래도 세상은 지극히 다단하고 우리의 일생이 수월찮게 긴 탓이기도 했으리다. 그래도 끝장의 종지부는 스스로 찍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숙명이오. 그것이 우발이든 자의든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소. 공연한 수다가 길었소, 동방의 선생, 잘 가시오. 일어나서 배웅하지 못해 미안하오.

문: 더없이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뵙고 나니 아둔한 서생의 눈이 킬리만자로의 설원처럼 열리는 것도 같습니다. 머잖아 뵈올 날까지 명복을 누리소서.(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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