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어머니 추억

어머니를 뵈웠다. 깜작 놀랐다. 세상 떠나신지 50년을 훨씬 지났으니 놀랄 수밖에.

세면대 위 거울에서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신다. 은발의 곱슬머리가 웨이브를 그리며 오른쪽 귀를 살짝 덮었다. 시원한 이마와 미간에서 곧게 흘러내린 부드러운 코, 그리고 기다란 인중 밑에 꽉 다문 입이 균형 잡히고 기품이 서려있다. 인자스러우면서도 약간 냉정해 보였다. 50년 전 어머니 그대로다.

표정이 자꾸만 변했다. 순박한 미소, 무엇이 그렇게도 서러운지 눈물방울, 분노가 곧 폭발할 것만 같은 성난 표정 등등. 자세히 거울을 들여다보니 내 얼굴이었다. 내 표정이 거울에 굴절되어 어머니의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어머니를 닮았을까!

어머니가 마흔둘 노산에 날 늦둥이 막내로 낳으셨다. 오뉴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젖줄은 메말라 꼬물거리는 갓난이를 내려다보며 “이것이 사람이 될까! 스물 살이 될 때까지만 내가 돌보면 좋으련만!”라며 연민에 찬 눈빛으로 내려다 보셨다.

불면 꺼질세라 건드리면 깨질세라 애지중지하셨다.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뽀얗게 토실토실 자랐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할머니의 등에 업힌 애기가 귀여워 서로 안으려고 다투었다.

이런 일들을 갓난이가 어찌 알리!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동네 가까운 어른이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반듯하게 잘 자랐구나. 요조숙녀 자네 어머님 은혜를 잊지 말게나”라고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알려주셨다.

말과 행동이 품위 있고 정숙한 여자를 요조숙녀窈窕淑女라 한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공리공론의 성리학보다 실사구시의 실학을 존중하는 집안의 핏줄을 이어받으셨다.

어머니의 외삼촌께서 “네가 문화류柳씨 집안의 자손인데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덕망 높은 일가친척 어른들을 찾아뵈었을 터인데 여자로 태어나서…”라고 안타까워하셨단다. 어머니는 실학자 류득공의 후손이란 긍지를 갖고 사셨다.

어머니는 열일곱 어린나이에 성리학자 김종직 후손의 동갑내기와 결혼하셨다. 시집 온지 5년에, 일제에 항거하는 할머니의 지인이 맡기고 간 폭탄이 폭발하여 할머니가 만신창이가 되셨다. 진주도립병원에서 3년간 입원치료를 하였으나 두 손을 잃은 채 피골이 상접하여 집으로 돌아오셨다.

할머니 곁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29년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화석인이 되토록 오랜 세월이었다. 효도가 즐거웠을까? 아닐 것이다. 유학의 도덕률이 며느리가 시부모媤父母에게 효도를 다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각고의 세월을 한결같이 보내셨을 것이다.

가사와 농사까지 중노동을 하며 육남매를 양육하셨다. 아버지는 풍류에서 헤어나지 못해 집안은 퇴락되어갔다. 기울어가는 집안을 지키려고 몸부림쳤으나 아녀자로서는 불가능했다.

불평도 원망도 고통도 스스로 삭히며 묵묵히 사셨다. 시부모의 3년 탈상脫喪이 끝나곤 며느리에게 집안을 맡기고는 딸네 집으로 떠나셨다.

살아온 세월이 한이 되어 가슴앓이를 하셨다. 통증이 끓어오르면 방바닥을 헤매며 신음하셨다. 곧 돌아가실 것만 같아 “하느님, 어머니 아픔을 제가 대신하게 해 주세요”라고 나는 기도했다.

밤이면 단 둘이었다.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필사본을 읽으셨다. 처절한 상황이 마치 자기인양 눈물을 흐리셨다. “어머니 울지 마”라며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대학입학시험을 보려고 떠나는데 “이것, 보름달밤에 실을 바늘귀에 꿰어 만들었다”라며 흰 가제 손수건을 손에 쥐어주셨다. 대낮에도 바늘귀를 못 꿰셨는데 보름달밤에… 나는 손수건을 오래오래 간직했다.

말단 공무원 봉급이 하숙비에도 못 미칠 때 시골에 내려가면 어머니는 주머니 돈을 남들이 보지 않게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떠나온 고향집으로 돌아가 그 옛날 그대로 정든 일가친척과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텃밭에서 고추와 가지, 상추와 시금치 등 온갖 채소를 가꾸기를 얼마나 바라셨을까?

꽃가마로 고향으로 모셨어도 어머니 은혜에 만분지일에도 못 미친다. 내가 한 번도 따뜻한 밥 한 상 모시지 못했는데 타향에서 하늘나라로 가셨다. 세월이 갈수록 회한은 깊어만 간다.

형님이 세상을 떠나고 내가 얼마동안 어머니 제사를 모시다가 장손에게 넘겼다. 지난 6월 12일이 어머니 기일이었다. 촛불을 켜놓고 십자가와 어미니 존영 앞에서 나 홀로 “어머님께 영원한 안식을 주시옵소서!”라고 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진속의 어머니께 “어머니 죄송합니다”라고 사죄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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