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지팡이

나에게 등나무지팡이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아마도 30년도 더 되었다. 후배가 외국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나에게 정성스럽게 포장된 지팡이를 선물했다. 고마운 척 했으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쌩쌩한 나에게 지팡이를 선물하다니! 날 뒷방노인으로 취급하는 거야”란 생각이 스쳐서였다.

그러다 고마운 생각으로 바뀌었다. 등산할 때 필수품이 됐기 때문이다. 시내를 다닐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등산할 때면 꼭 챙겨들었다. 산을 오르내리다 중심을 잃고 몸이 뒤뚝거리면 균형을 잡아주어서였다.

서울 근교의 명산은 물론이고 저 멀리 지리산 종주를 할 때도 지팡이가 내 곁을 지켜주었다. 하산을 하는데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졌다. 산돼지가 달려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겁이 왈칵 났다.

그 순간 “괜찮아”라며 나는 지팡이를 꼭 붙잡았다. 묵직한 등나무지팡이를 거꾸로 들고서 뭉뚝한 손잡이로 산돼지 정수리를 내려치면 박살이 나리라! 그 순간부터 등나무지팡이가 나의 수호신이 됐다. 지팡이가 나의 속물屬物에서 나와 동격同格이 됐고, 나의 수행隨行에서 나와 동행이 됐다.

산과 지팡이와 내가 삼위일체가 되어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산은 ‘내 좀 봐’라며 장엄한 자태를 뽐냈고, 지팡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튼튼한 나를 꼭 붙잡아’라 했다. 나는 기분이 그저 그만이라 ‘야호~’라고 고함지르면 메아리가 되어 산골짜기로 울러 퍼졌다. 지팡이가 이렇게 호연지기를 넘치게 하다니!

고교동창 산악회가 전국의 명산을 멀다하지 않고 왕성하게 찾아다니다가 나이가 들수록 활동범위가 좁혀갔다. 여든에 접어들면서 서울대공원으로 한정됐다. 젊은 날을 그리워하면서 대공원 등산만이라도 할 수 있어 축복이라고 자위를 했다.

2월 첫 토요일, 대공원 등산을 하려고 준비를 하는데 지팡이가 사라졌다. 이곳저곳을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족에게 물어도 모른다 했다. ‘발이 있어 걸어갔나, 날개가 있어 날아갔나? 30년 인연이 지겨워 날 버리고 멀리 떠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속했다. 그러면서도 지팡이가 내 앞에 곧 나타날 것만 같았다.

잔설이 있어 지팡이 없이는 등산이 어려웠다. 대공원 입구 가게에서 지팡이 하나를 골라잡아 등산을 했다. 등산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가게 앞에서 아가씨가 “할아버지, 그 지팡이 여기서 사셨지요?”라 물었다. “그런데 왜?”라 되물었다. “돈을 잘 못 받았어요”란다. “얼마를 더 주면 되지?”란 내 말에 “아니에요. 제가 더 받았습니다”란다. 돈을 돌려주려고 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떨며 기다렸다니!

나는 감격했다. 연극영화과 4학년으로 아르바이트를 한단다. 돌려주는 돈을 교통비하라고 몇 번이고 도로주려고 했으나 끝까지 사양했다. 눈뜬 사람 코 베어 가는 세상에 이런 갸륵한 학생이 있다니! 가슴이 벅찼다. 얼굴도 예쁘고 예의도 발라 인기배우가 되기를 바랐다.

등산회원들에게 “오늘 점심은 내가 쏠게”라고 천진스럽게 으스댔다. 20여명의 동창들과 음식을 즐기며 감격을 나눴다.

지팡이!

세상엔 지팡이 종류가 허다하다. 꼬부랑 노인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지하는 작대기, 노신사가 멋을 부리려는 단장短杖, 개화기에 신사유람단의 개화장開化杖, 법장法藏을 설법할 때 지니는 큰 선님의 법장法杖, 가톨릭 교도권을 상징하는 교황의 목장牧仗이 모두 지팡이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지팡이가 또 하나있다. 시민이 도탄에 빠졌을 때 손을 내미는 경찰을 민중의 지팡이이라 한다.

이런 말이 전해온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을 자식이 다 사용할 수 있어도 지팡이와 안경만은 자식이 사용할 수 없단다. 지팡이와 안경이 아버지의 팔다리와 몸과 같은 지체라서 그런가보다. 그만큼 지팡이와 안경을 아버지의 분신으로 여겨 경건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나의 분신 등나무지팡이는 사라졌다. 고운 정 미운 정 다든 30년 조강지처와 사별한 남정네의 심정이 이렇게 스산할까? ‘나 여기 있어’라며 금방이라도 나의 등나무지팡이가 웃으며 나타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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