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빈둥빈둥 거린다

세상이 들끓는다. 연일 폭염경보가 발령되고 열대야가 계속된다. 온열병으로 숨을 거두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쪽방촌 노인들이 지옥 같은 밤을 어떻게 지새울까? 수많은 가축이 폐사된다. 가두리 물고기도 하얗게 배를 들어내고 죽는다. 농작물 폐해도 심각하다.

예비전력이 바닥을 친단다. 정전이 된다면 어쩌나 걱정이다.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군부까지도 와글와글 거린다. 재앙이 닥칠 것만 같아 불안하다. 그래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다윗왕의 통 큰 배포를 믿을 수밖에.

옛날 신문에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하고서 에어컨 없는 방에서 선풍기로 여름을 지내신다는 기사가 있었다. 감동했다. 영락교회 교인들이 그까짓 에어컨 하나 못 달아드릴까? 아방궁이라도 지어드릴 터인데…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난을 본받는 고결한 성직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에어컨이 없다.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심신이 탈력을 잃는다. 숨이 가쁘다. 어쩔 수 없이 사우나파크를 찾는다. 온탕, 열탕, 약탕이 있고 냉탕에는 아이들이 물장난을 하느라 와글와글하다. 나는 이 탕 저 탕을 돌아가며 팔다리를 휘졌고,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손수 지압을 한다. 내 건강비결이다. 실외 해수탕에 담근 몸을 햇볕에 내맡긴다. 세월에 찌든 내 몰골이 한심스럽다.

그리고 옥상정원으로 올라간다. 정원수와 잔디가 잘 가꾸어져있다. 분수대를 사방으로 둘러싼 회랑이 있고, 정원수 사이사이에 원두막 같은 정자들이 있다. 그늘이 드리운 정자 하나를 골라 바닥에 누어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파랗다. 구름이 흘러간다. 비행기가 날아간다. 지난날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렇게 한가하게 빈둥빈둥 거렸던 때가 또 있었을까? 없었다.

1987년에 국방대학원에 입교했다. 오리엔테이션에서 “여름방학이 2주입니다. 2주간의 긴 휴가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까? 긴장을 풀고 즐기십시오. 논문을 한 편 써야만 졸업을 할 수 있음을 명심하시고”란 교수의 설명에 귀가 솔깃했다. ‘얼씨구,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 깨벗쟁이 친구들과 옛날처럼 개울에서 물장구치며 가제잡고 놀아야지. 그리고서 근무했던 몇몇 항구들을 찾아가 동료들과 싱싱한 생선안주에 소주파티 해야지’라 마음먹었다.

방학이 왔다.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나라가 시끌시끌한데 고급공무원이 얼쩡거리고 다니면 욕 얻어먹을 것이 뻔해 집에서 논문을 쓰기고 작정했다.

국방대학원의 국제관계 전공에는 미소양극체제, 소련의 국제전략과 무기체계, 중소국경분쟁 등 소련관련 과목이 많았다. 83년과 85년에 IMO와 소련정부가 공동으로 주관한 소련 오데사 세미나에 각각 참가했다. 세미나 자료를 번역해 책 두 권을 발간하였기에 나름대로 소련 해운을 꽤나 알고 있었다.

특히 미소냉전이 정점으로 치닫던 83년에는 소련군부가 캄차카반도 상공에서 KAL기를 격추시켜 자유세계 항공기가 소련취항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1주일을 더 머물면서 시민의 생활양태도 엿볼 수 있었다.

85년에는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정책을 펼쳐 소련이 변화의 조짐이 보였고 냉전체제는 허물어지리라 예측되었다.

소련 오데사 세미나와 국방대학원 국제관계를 조합하면 괜찮은 논문소재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한국의 기술과 자본, 시베리아의 풍부한 자원이 서로 궁합이 맞겠다는 판단도 들었다.

빈둥빈둥 거리지 않고 팬티만 입고 진땀을 흘리며 자료를 뒤적여 논문을 써내려갔다. 논문이 완성됐다. <소련의 개방정책을 통해 본 한/소 해운교류 예측>이란 제목의 논문이 빛을 발휘했다. 자랑 같아 겸연쩍지만 사실은…

첫째, 우수논문으로 선택될 뻔했으나 현역군인에게는 논문이 진급에 도움이 된다며 지도교수가 양보하라고 해서 선심을 썼다.

둘째, 고교동창인 故박상천 법무장관이 원내총무일 때 김대중 총재를 수행해 소련에 가면서 소련자료를 부탁했다. 논문을 한 질 주었는데 돌아와 대한민국 공무원이 어쩌면 이런 논문을 썼느냐고 나를 치켜세웠다.

셋째, 해운산업연구원 송희연 원장이 논문제목을 보고서 해운최고경영자 조찬회에서 논문발표를 부탁해 롯데호텔에서 발표했다. 4년 후인 1991년에 한/소 해운교류가 된다고 예측했더니 ‘꿈꾸네. 잠꼬대하네’라고 비꼬았다.

그런데 정확히 4년 후, 부산해운항만청장으로 근무하던 1991년 7월 9일 한/소 직항항로 개설을 축하하는 기념식에서 나는 감격의 축사를 했다.

지금 찜질방 같은 무더위를 피해 사우나파크 옥상정원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빈둥빈둥 거린다. 평생 머리와 손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는데 이제 80고개를 넘겼으니 나에게도 빈둥빈둥 거릴 특권이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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