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하드가 묵고파서

저녁 여덟시 반경 동네 상가를 걸어왔다.

가게 앞 계단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셨다. 구걸하는 분은 아닌데 초췌했다. 남루하지는 않은데 가련해 보였다. 무언가 애원하는 표정이었다.

할머니 앞을 지나 몇 발자국 옮겼는데 ‘그냥 가면 안 되지!’란 양심의 소리가 들렸다. 가는 길을 멈추고 되돌아서 할머니께로 다가가 “할머니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라고 물었다. “하드가 묵고파서”란 대답이었다.

앉아계신 곳이 아이스크림 가게 앞이라 하드가 아이스크림 한 종류라 짐작하고 “하드가 얼만데요”라고 물었다. “몰라”라고 대답하셨다. 지갑에서 2천원을 꺼내 드렸다. “고마워. 복 많이 받아요”란 말씀이 모기소리였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데 할머니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할머니가 왜 그곳에 계셨을까? 저녁밥 시간이 지났는데도 왜 가족이 집으로 돌아오지 안했을까? 배가 고파 허기를 느꼈을까?

폭염이 계속되는 날씨에 찜질방 같은 집에 머무를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없었다. 밥집 앞을 지났다. 따스운 밥은 생각만 해도 몸이 열을 받았다. 상가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섰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몸과 마음이 시원해 질 것만 같았다. 막상 가게로 들어가려니 손에 쥔 돈이 없었다.

손을 내밀어 “한 푼 줍소”라고 구걸하려니 체면이 허락지 않았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지나가면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지 않을까하고 마냥 기다리고 계셨을까?

할머니를 모시는 가족은 왜 저녁시간이 지났는데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최저임금과 노동시간다축 여파로 일자리를 잃었을까? 소상공인들이 생존권을 위해 거리로 나섰는데 가족이 그기에 참가하고 있을까? 별생각이 다 났다.

며칠 전, 우유사러 갔더니 편의점이 폐업됐다. 아르바이트 학생을 하나 고용해 부부가 편의점을 경영했다. 최근에 아르바이트 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70대 노부부 둘이서 24시간을 교대로 장사를 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어 폐업했으리라.

마트로 갔더니 거기도 문을 닫았다. 또 다른 마트에서 우유 하나를 사들고 나왔다. 그 마트는 꽤 규모가 큰데 분위기는 썰렁했다.

편의점, 식당, 마트 등이 문을 닫았다. 소상공인들이 거리로 나와 생존권을 외쳤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 가난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갉아먹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빈민층으로 전락되어 빈부격차는 심화될 것만 같다.

할머니는 가난했던 보릿고개 세대다. 시부모 모시고, 남편 뒷바라지하며 애들 키우느라 고생했다. 그러나 고생을 낙으로 삼고 미래의 찬란한 희망을 꿈꾸며 살았다. 그렇게 살면서 자식들 공부시켜 시집장가 보내느라 노후준비를 못했다. 이제 늙어 심신은 소진되고 가진 것도 소진됐다. 막막하다. 이런 노인들이 그 할머니뿐이랴.


스탈린 시대에 강압적인 수단으로 공업화를 밀어붙여 1950년대까지 경제성장률 6.7%를 이룩하여 소련은 미국과 어깨를 겨눴다. 그러나 통제경제는 경제구조가 단순할 때는 고도성장이 가능했으나 산업화된 다양한 경제구조에서는 불가능했다.

중앙집권적 통제경제는 계획차질, 산업기술 낙후, 낭비와 무기력, 관료주의 병폐와 비효율을 초래해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로 바뀌었다. 노동생산성도 70년대에 들어오면서 전반기는 -0.1%, 후반기는 –0.3%까지 내려앉았다. 민생은 피폐해졌다.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에 집권하고서 개혁개방정책을 펼쳤다. 경제부흥을 위해 기업의 독자성, 가격체계의 합리적 조정, 임금의 차등제도, 경제기구의 간소화 등 시장경제로 대전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깊은 병에 걸린 환자의 수술적기를 놓쳤다.

시월혁명 70년에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붕괴되었다. 결국 러시아로 회기 되었다.
<87년 국방대학원 필자의 졸업논문 『소련의 개방정책을 통해 본 한/소 해운교류 예측』에서 따옴>

 

이튼 날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젊은 점원에게 “하드가 어디 있지요?”라고 물었다. “저쪽 두 번째 냉동고에”란 대답을 듣고 거기서 하드 하나를 꺼내어 입에 넣었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식도로 내려가니 몸이 시원해졌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4백 원이란다. 할머니께 2천원을 드리고는 부족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는데 걱정을 내려놓았다.

할머니는 하드 다섯 개로 열기와 허기를 풀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 누군지 모르지만 돈을 주었던 사람에게 고마움을 보내며 잠드셨으리라. 겨우 2천원으로 소박한 보람을 만끽하였다니!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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