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규 회장
불우했던 어린 시절, 생사의 고비 넘다
 
누가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서울’이라고 대답한다. 정확히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서울서 자랐고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버지 고향은 경남 함양인데 교사 일을 하시느라 여러 지방으로 많이 이사를 다니셨기 때문에 그 자식들은 고향을 얘기하기가 어렵기만 하다.

부모님은 자식을 3남 3녀를 두셨는데 나는 그 중 둘째 아들이었다. 옛날에는 어느 집이나 자식을 많이 낳았기 때문에 형제들이 6남매, 7남매인 경우는 보통이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동대문국민학교였다. 동대문국민학교는 서울운동장(동대문야구장) 건너편, 을지로 6가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은 안암동에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동대문국민학교를 한 살 늦은 나이 9살에 들어갔다.

내가 이름 있는 서울중학교에 들어간 것을 보면 초등학교 시절 공부를 꽤 잘 했던 것 같다. 내가 서울중학교를 다닐 때 우리 집은 미아동으로 이사를 간 상태였다. 매일 같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 서울중학교가 있는 서대문까지 걸어서 다녔다. 전철을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전철 종점인 돈암동까지 미아리 고개를 넘어 걸어가야 했고 종로 4가에서 전철을 바꿔 타고 광화문까지 가서 내려서 다시 걸어서 서대문의 학교까지 가야만 했다.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걸어서 학교까지 갔다가 걸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1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는데 매일 같이 도시락이 들어있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걸어서 다녔던 것이다.

그래도 나의 서울중학교 시절은 꿈 많은 소년기였다. 나는 위인전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중학교 때는 특히 슈바이처 전기를 읽고 커서 반드시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꿈 많은 사춘기는 6·25 전쟁이 나는 바람에 완전히 생사의 기로에 서는 암울한 시기로 변하고 말았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엄청난 고생을 하고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지 않으면 안됐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는 서울중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를 한해 늦게 들어간 탓에 나이는 16세였는데 키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또래들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이 때 바보처럼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공부는 해야겠다 싶어서 학교를 갔다.

학교에는 나 말고도 많은 학생들이 나와 있었다. 가만히 보니 완장을 찬 사람들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인민위원회 만세’를 외치게 하고는 줄을 세워서 다른 학교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의용군에 나가자”고 구호를 외치고, 막 선동을 하면서 우리를 끌고 간 것이다. 끌려가서 보니 교보문고 뒷편 종로소방서 옆에 있는 수송국민학교였다.

이미 이 학교 운동장도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꼼짝없이 의용군에 차출되는 상황이었다. 큰일이었다. 부모님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도 없는데 이대로 끌려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다. 어떻게든 도망을 쳐야했다.

그 때 난 기지를 발휘했다. “아이쿠 배야, 아이쿠 배야”하면서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설사가 나서 죽겠어요”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랬더니 경비원이 화장실에 빨리 갔다 오라고 했다.

나는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가서 맨 가운데 칸에 자리를 잡고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밖에서는 학생들을 트럭에다 차례로 싣고 떠나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다음호에 계속>

▲ 한강을 건너는 피난민들(자료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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