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용군에 두번 차출, 필사의 탈출 감행

▲ 박종규 회장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알 수가 없는 나는 숨죽이고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만 있었다. 조금 있자 화장실 양쪽에서 동시에 화장실 문을 탁탁 열어 제치며 사람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이제 꼼짝없이 죽는 구나”하고 극도의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그 확인 작업은 내가 앉아 있는 칸 바로 옆에서 멈췄다. “없다. 가자”하는 소리와 함께 두 경비원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어두워질 때까지 나는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나와서 걸어서 미아리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살았구나하는 안도의 한 숨도 잠시 뿐이었다. 미아리 우리 동네까지 거의 다 와서 바로 동네파출소 앞에서 검문을 당한 것이다. 파출소로 들어오라고 하여 들어가 보니 이미 학생 몇 명이 잡혀와 있었다. 참으로 재수가 없었다. 집에 거의 다 와서 다시 잡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의용군에 끌려갈 팔자인가 보다하고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차량에 타라고 했다. 차량에 탑승했더니 이번에는 바로 총을 나누어 주었다. ‘아 이제는 정말 전쟁터로 나가는가보구나’하는 생각에 엄청난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차에서 내려서 보니까 미아리 쪽의 호박 밭이었는데 거기에도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우리에게 총을 준 이유가 있었다. 그 호박 밭에 모인 사람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경비를 서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50미터 간격으로 늘어서서 넓게 경비를 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다 끌고 간 다음에는 필시 경비를 서고 있는 우리들도 전쟁터로 끌려 나갈 게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안 되겠다, 피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으나 그 곳이 넓은 밭이라서 도망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먼동이 트기 전에 도망을 치지 않으면 영영 달아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곧바로 총을 땅바닥에다 내려놓고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어둑어둑한 속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마구 달려서 집으로 피신을 했다. 그래서 나는 살 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도망을 치지 못했다면 아마도 낙동강 전투 같은데 투입되어 죽음을 당했을 것이 뻔하다. 그 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죽어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성년의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키가 큰 탓에 6·25전쟁 동안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우리는 6·25 전쟁 중에 중학교를 다녔으니까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모교인 서울중학교도 전쟁 중에는 부산 송도에 피난 학교가 있었고, 1·4후퇴 때 나도 부산으로 내려가 그 피난 학교를 잠시나마 다녔다. 중학교 졸업은 서울에서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졸업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 당시는 중고등학교가 6년제였기 때문에 서울고등학교 1학년이 중학교 4학년에 해당되는 셈이었다.

서울중학교는 일제시대에는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이었다. 이 학교가 해방이 되면서 서울중학교가 됐는데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의 자제들이 아주 많이 다녔다. 시험을 쳐서 학생들을 선발했는데도 이북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 토박이들이 많이 들어간 경기중학교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6·25 전쟁은 우리 가족에게도 아주 크나 큰 불행이었고,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를 남겼다. 아버지가 이북으로 끌려가서 생사를 모르게 된 것이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미아리에서 농장을 하고 계셨으나 전쟁이 나기 직전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 조병옥 박사의 선거사무소장을 맡아서 일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단번에 서울까지 밀고 내려왔으니 선거에서 우파 거물 정치인을 도와준 아버지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한강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피난도 가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공산당들한테 잡혀서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갔다. 아버지가 납북되고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으나 전쟁 통에 아마 돌아가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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