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영기업체 사장’ 꿈을 깬 5·16 군사혁명

▲ 박종규 회장
당시 내가 10대 1의 경쟁을 뚫고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했다는 얘기를 앞서 쓴 책에서 밝혔지만 당시에 내가 대한해운공사에 들어가게 된 데는 또 다른 사연도 있었다. 그 당시 신입사원을 원래 10명을 뽑기로 되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10번째로 합격시켜야 할 사람들의 점수가 3명이 똑같았다. 이로 인해 예비 합격자 명단에는 12명이 합격자로 올라왔던 것이다.

그 3명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꼴찌로 턱걸이 한 것인데, 정치학과 출신이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정치학과는 뺍시다”라고 하면 정치학과 출신인 내가 먼저 떨어져 나가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석두옥 사장은 자신이 모셨던 사장이었던 김용주 의원이 추천한 나를 떨어트리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합격자 선정을 위한 최종 심사에서 사장이 합격자 명단 끝자락에 있는 내 이름 옆의 정치학과라는 비고란 표시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린 채 심사위원들에게 보여주면서 “마지막 합격자 3명의 점수가 똑 같으니 12명 모두 합격자로 합시다”라고 말했다. 심사위원들도 이에 모두 동의함으로써 대한해운공사 공채 1기나 마찬가지인 당시의 합격자가 12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사실은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석두옥 사장에게 인사를 갔을 때 석두옥 사장이 날 보며 “자네는 내 엄지손가락 때문에 합격이 된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어서 알게 되었다.

대한해운공사 입사 당시에는 이런 상황을 몰랐기 때문에 난 내가 당당하게 합격했다는데 만족감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김용주 의원의 추천장도 시험을 칠 수 있게만 해 준 것이지 내가 실력으로 붙은 것이니까 소위 ‘빽’으로 입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대한해운공사 5대 사장과 한국선주협회 1대 회장을 지낸 故석두옥 회장.
1960년 가을 내가 스물여섯의 나이로 대한해운공사를 들어갔을 때, 선배들 중에는 뛰어난 실력자들이 많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특히 외국어를 잘 하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아주 많았다. 이것은 당시 외국에 지사가 있는 대한민국 기업은 대한해운공사 밖에 없었고 그런 까닭에 특히 외무부 출신들이 대한해운공사로 많이 이직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발령받은 부서는 기획실 기획과의 보험계였다. 전작에서도 밝혔듯이 박종규라는 이름을 같이 쓰시는 분이 마침 노무계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보험담당하는 박종규, 즉 보박(保朴)으로 불렸다.

당시 나는 한국은행 입행이 목표였지만, 어렵게 들어온 해운공사라는 국영기업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학창시절에 드비시의 ‘라 메르’를 좋아해서 바다 관련 산업과는 숙명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대한해운공사는 건물이 서울역처럼 현관 천정이 높고 둥근 돔으로 되어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첫 출근하는 날 높은 천정을 쳐다보면서 나중에 이 회사의 임원을 거쳐 사장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서울중학교에 들어간 것도 우거진 숲이 마음에 들어서였고, 대한해운공사 입사도 현관 천정의 미각적 힘이 나를 끌어들였던 것 같다. 예술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런 좋은 회사의 임원 자리에 까지 올라가려면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갓 입사한 나는 이런 화두에 골몰했다. 당시는 4·19 직후라 노사분규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노동문제를 잘 해결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30년 후에 이런 나의 예상은 적중했고 그 바람대로 나도 노동문제에는 일가견이 갖게 됐다.

그러나 입사 때 임원이나 사장이 되겠다는 나의 다부진 포부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깨졌다. 1961년 5월에 발생한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대한해운공사는 경영체계가 완전히 바뀌는 등 그 향방이 암울한 상태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회사에 군인출신들이 밀고 들어오면서 그 실력 좋던 선배들이 다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5·16 혁명의 여파로 대한해운공사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1961년 5월 30일 대한해운공사 사장에 육군 중령 출신의 임광섭씨가 부임해 오면서 석두옥 사장은 하루아침에 해고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새로 취임한 제6대 대한해운공사 사장 임광섭씨는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무능한 사장이었다고 난 기억한다. 그가 대한해운공사의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혁명 당시 대구지역 책임자였다는 그 단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혁명에 가담한 공로로 국영기업체 사장직을 하나 얻었던 것이다.

임광섭 사장이 재임했던 3년여 동안 대한해운공사는 적자 경영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했다. 혁명이 나기 전의 기라성 같은 실력있는 사람들을 회사에서 다 내 쫓아내고 대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한자리씩 주다보니 회사 경영이 엉망이 돼버린 것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체육을 진흥시키는데 일조하겠다며 야구부, 역도부 등을 만들어 회사 자금을 물 쓰듯 했으니, 적자가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돈이 있고 ‘빽’을 좀 쓴 사람들은 일본지사가 있는 동경으로 많이들 나갔다. 그래서 할 일도 없는데 일본 동경지사에는 15~16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 마디로 일은 안하고 돈만 써대는 것이었다. 회사가 하루 다르게 망해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다 지켜보지 못하고 1961년 8월에 부산지점 관리실로 발령이 나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입사초기부터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선원들의 노동 현장을 직접 지켜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지사에 내려가서 내가 선원 문제 해결에 발 벗고 뛰어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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