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송출, 선원수첩 승선제도 만들어

▲ 박종규 회장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실업문제였다. 선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선원자격증이 있어도 탈 수 있는 배는 몇 척 없었기 때문에 승선하는 문제로 선사와 선원간, 선원과 선원간에 마찰이 자주 발생했다. 나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바로 우리 선원들의 해외 송출이었다. 당시 전국해상노조 위원장이었던 방해창씨를 설득해 우리나라 선원을 외국선사로 송출하도록 한 것이다. 방해창 위원장은 나의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노조명의로 외국선사들에게 한국선원을 써줄 것을 부탁하게 됐고 이것이 오늘날과 같이 민간 기업들이 선원송출을 사업화하는 계기가 됐다.

선원의 노동 문제에 열의를 가지고 덤벼들었기 때문인지 부산지사로 내려가 얼마 안 있어서 대한해운공사 노동조합 육상직원 분회장이 됐고 뒤이어 1962년 말에는 전국해상노조 해운지부 부지부장까지 됐다.

요즈음 우리나라 선원들은 선원수첩을 여권 대신으로 쓰고 있지만 이런 제도를 만든 계기를 마련한 당사자도 바로 나였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의 얘기지만 1963년 추석을 사흘 앞둔 목요일 나는 부산의 해운지부 노조와 인천의 협성해운 대리점 양쪽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다. 인천항에 입항한 파나마 국적 배에 한국선원 15명을 승선시킬 수 있도록 출항일인 토요일 오후 1시까지 여권을 발급받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시에 나는 본사의 선박도입반 계장으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전작에서 밝힌 것처럼 이 때 나는 ‘선원수첩으로 여권을 대신하자’는 아이디어를 내서 법무부의 부령까지 고친 끝에 가까스로 선원들을 무사히 승선시켜 출국시킬 수 있었다. 불과 이틀 만에 기적 같은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지금은 모든 선원들이 여권 대신 선원수첩으로 편리하게 출입국 신고를 하고 있다. 이런 편리한 제도로 인해 외국에 송출되는 한국선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최고조에 달했던 1988년도에는 4만 8000명이나 송출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엉터리 밀수 방지 대책 만들다
 
이즈음 나는 선원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인 선원들의 밀수 문제와도 맞닥뜨렸다. 5·16혁명 후 임광섭씨가 취임하고 얼마 안 돼서의 일이다. 기획실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위로부터 '선원들의 밀수 방지 대책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입사한지 10개월도 채 되지 않는 나는 상당히 당황했다.

그 당시에는 부산항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밀수 실태는 심각해 사회 문제가 되곤 했다.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던 나로서는  밀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밀수 방지를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밀수는 개인이 혼자서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따라서 누구 한사람이 밀수를 하더라도 단체로 기합을 주면  밀수가 근절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개인이 밀수를 하더라도 담당 부서 전체를 처벌하는 방안을 대책이라고 내놓았다. 선박을 운항하는 선원들은  갑판부, 기관부, 통신부로 나뉘어 있었으므로 누구 한사람이 잘못을 하면 그 부서 전체 인원에 대해 단체로 감봉처분 하든가, 인사 조치를 하는 안을 아이디어라고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아주 엉터리 방안이었다.  부산으로 발령이 나서 현장에 가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인이 밀수를 해도 단체로 벌을 주니까 이제는 대놓고 단체별로 밀수를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한배를 탄 선원 전체가 작당 해 밀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사람이 잘못하면 단체 기합을 준다는 방침이 완전히 역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만든 선원 밀수 방지 대책이 오히려 단체 밀수 장려책이 됐으니 그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현장 선원들에게 밀수 방지 대책이 얼마나 효과가 있느냐고 질문을 하면 모두들 피식피식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이것 큰일 났구나 싶어서 전무에게 잘못된 대책이니 시정해 달라고 편지도 쓰고, 직접 만나 얘기도 해봤지만 전무는 간부들에게서 잘 되고 있다는 보고만 받았기 때문인지 계속 시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나름대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됐다. 만약 내가 사장이 된다면 제일 먼저 밀수 근절을 시행에 옮기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내가 독립해 코리아케미컬캐리어스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선원들의 소지품 검사를 해 밀수 방지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였던 것은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깊은 동기는 자기의 체험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체험을 하지 않으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가 없다. 아무런 경험이 없는데 아이디어가 나올 리가 만무하다. 특별히 머리가 좋지 않고서야 어떻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 수가 있겠는가? 해운업에서 중요한 예측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결국은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이 체험한 것을 현실에서 적용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본인이 선택할 문제이다. 나의 경우도 생각해 보면  밀수를 하든 말든 난 모르겠다고 하고 그대로 방치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성취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