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100주 사기 운동을 벌이다

▲ 박종규 회장
이맹기 사장 시절에 대한해운공사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같은 군인 출신이라지만 제6대 임광섭 사장은 실력있는 직원들을 거의 다 몰아내고 회사를 엉망진창으로 경영해 적자에 허덕이게 했던 반면, 제7대 이맹기 사장은 뛰어난 경영실력을 발휘해 회사 경영을 흑자로 만들어 놓았다. 나로서도 사장님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마음껏 실력을 펼쳐 봤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러한 호시절도 1967년부터 해운공사가 민영화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끝나가고 있었다.
  
전작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나는 이즈음에 대한해운공사 우리사주조합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었고, ‘주식 100주 사기 운동’등 사원지주제운동도 전개하고 있었다. 1968년 여름, 중앙일보 1면에 ‘대한해운 공사 민영화 반대’ 광고를 냈다가 가판이 모두 회수되고 내가 피신을 했던 사건도 이 때 일어난 것이다.

사실 우리사주조합 설립을 기획하고 주도했던 것이 바로 나였다. 나는 당시 정국으로 볼 때 국영기업인 대한해운공사가 특정 재벌에게 불하될 가능성이 크다고 느꼈고 그것을 방지하려면 사원들이 주식을 소유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찍이 1966년 연말, 내가 조선과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 선배 과장들에게 재벌기업으로 민영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사주조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적이 있다.

결국은 그런 노력들을 바탕으로 실제로 '우리사주조합'을 만들 수 있었고 내가 사무국장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 이맹기 사장은 우리사주조합을 주도하는 나를 격려해 주었고 공식적으로 도와줄 수는 없지만 방해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줬다. 

처음에 우리사주조합 운동을 벌일 때 사회단체나 노동조합에서 많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리사주조합이 벌인 주식 100주 사주기 운동은 급기야는 청와대까지 전달되어 박정희 대통령과 이후락 비서실장까지 명부에 서명하고 주식대금을 납부하는데 까지 발전하게 됐다. 기금이 2000만원이 넘어서자 우리들은 재무부를 찾아가 주식을 공매할 것을 청원했다. 여기서 우리는 경매 예정 주식 3만주를 운 좋게 매입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 여름이 되면서 대한해운공사 주식의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18만주를 재벌기업에 매각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우리들은 우리사주조합 명의의 '민영화 반대 성명서'를 중앙일보에 게재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우리사주조합 관계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해운공사는 1968년 11월 한양대학교를 거느린 한양학원 재단 이사장이었던 김연준씨에게 불하돼 민영화되고 말았다.   
    

▲ 대한해운공사를 불하받은 한양학원재단 김연준 이사장
졸지에 해운공사가 개인에게 넘어가면서 우리들은 모두 실망감에 빠져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특히 노조운동과 우리사주조합 운동을 했던 나는 새롭게 들어선 경영진에게 미운 털이 박히는 바람에 회사에 나가는 것이 고역이었다. 더구나 국민을 위해서 근무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회사가 갑자기 한 개인의 소유로 넘어감으로서 내가 진정으로 봉사해야 할 대상을 잃었다는 절망감 때문에 괴로웠다. 정말, 더 이상은 회사에 다니고 싶지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새로운 경영진들로부터 요주의 감시대상 인물이었다. 노조 부위원장 경력에, 우리사주조합 사무국장까지 지냈으니 관찰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 직원 중 한사람이 “윗선에서 대한일보의 기자를 시켜서 나를 미행하고 있다”고 알려줘서 내가 미행까지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무엇 때문에 나를 미행까지 하는 것인지는 잘 몰랐지만, 아마도 해운공사 사장을 그만 둔 이맹기 사장과 내가 가깝기 때문에 뭔가 정보를 빼돌리지 않을까 의심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니면 눈에 가시 같은 나를 완전히 쳐내기 위해 뭔가 물증을 잡으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나는 그 때, 그만 두더라도 나에 대한 의심만은 불식시키고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의심을 풀 때까지는 굳건히 버티자고 다짐을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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