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실업자 신세, 창업으로 스스로 취업

▲ 박종규 회장
34세의 나이에 졸지에 실업자가 된 나는 여기저기 취직자리를 알아보았지만, 나를 오라고 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당시는 회사들이라고 해야 국영기업체 몇 개와 은행, 신문사 정도가 그나마 직장다운 직장이었고, 민간 해운회사도 몇 군데 되지가 않았다. 당시에는 존경하는 이맹기 사장이 세운 대한해운도 회사 설립 초기라서 직원을 더 뽑을 여력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내가 국영선사 출신이었고, 당시에 해운업계 사장님들과도 다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해운계 어디라도 취직은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라는 데는 한 군데도 없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일면이 있다. 나중에 누군가 나에게 얘기를 해주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결국 다른 해운회사 사장님들은 내가 대한해운공사에서 노조운동을 하고 우리사주조합을 만들었던 전력이 있기 때문에 부담스럽게 생각한 것이었다. 내가 회사에 들어와서 노조를 만들거나 사주조합을 만들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래서 6개월 동안이나 실업자 신세로 있는데,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해 동신화학이라는 회사를 들어가게 됐다. 이 회사는 자동차 타이어와 군화를 주로 만드는 회사로, 군납품을 생산했기 때문에 경영은 그리 어렵지 않은 회사였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회사는 항상 자금난에 시달렸다. 사주가 돈을 빼내어 다른 공장 짓는데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링겔주사를 맞으면서까지 열심히 밤새워 일을 했던 나로서는 이런 사실을 알고서는 도저히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됐다. 이 회사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앞으로 회사를 세울 경우 절대로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 깨끗한 회사 운영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무리 취직을 하려도 취직할 데가 없었다. 더구나 나의 전력 때문에 어떠한 선사도 오라고 하는 데가 없었다. 그렇다면 길은 단 하나, 스스로 회사를 만들어 나를 취직시키는 길 밖에 없었다. 결국은 스스로 창업하기로 결론을 내리게 됐다.

창업을 결심한 나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해운공사에서 내가 신규 사업으로 추천을 했다가 퇴짜를 맞은 케미컬화물 운송 사업이었다. 당시에는 한일합섬이나 태광산업 같은 큰 회사에서 케미컬 화학제품을 많이 수입하기 시작했는데 전문적으로 수송하는 선사는 없는 실정이었다. 나는 해운공사시절 동료였던 강병연씨와 머리를 맞대고 케미컬운송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일본에서 배를 도입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사업계획을 잘 짜서 평소에 많이 의지를 하고 있던 이맹기, 당시 대한해운 사장을 찾아가서 100만원의 출자금을 받고 회장으로 모시기로 하고 창업 준비 작업을 마쳤다. 이렇게 해서 1969년 12월 30일 나와 강병연씨가 주축이 되어 무교동 광일빌딩 지하 맥주홀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자본금 300만원의 코리아케미컬캐리어스㈜를 출범시키게 됐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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