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 버렸더니 오히려 살아났다”

▲ 박종규 회장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항암치료 문제를 놓고 의사들과 갈등이 생겼다. 병원에서는 위암 말기니까 항암치료까지 받아야 한다고 했다. 주사도 맞고 약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위암 말기환자의 생존율은 10%에 지나지 않는다고 암 백서에 나와 있었다. 이것을 본 나는 사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냥 제주도에 내려가서 편안하게 지내다가 죽을 것이라며 끝까지 치료를 거부했다.

병원측은 약을 안 먹으면 생존율이 5% 미만으로 떨어진다면서 겁을 주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거부하자 병원측은 정기적으로 검사받는 조건으로 제주행을 마지못해 승인했다. 그러나 정기검진 때마다 별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 벌써 해수로 13년이나 흘렀으니 나의 위암은 이제 깨끗이 정복이 된 셈이다.
 
처음에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수술이 끝나고 생각해 보니, 내 나이가 71세인데 그 정도면 많이 살았다 싶었다. 젊은 사람들도 교통사고다, 심장마비다 해서 많이 죽는 세상인데 70세가 넘은 노인네가 그만큼 살았으면 많이 산 것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나는 6·25 전쟁 통에, 그리고 사업을 하면서 극단적인 어려움에 처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인생은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업도 만들어 경영도 해봤고, 남들 한데 큰 욕을 먹은 적도 없고, 애들은 다 커서 성공해 있고, 뭐 하나 부러울 것이 없으니 이제 정말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을 정말로 포기하니까 오히려 생이 돌아온 것이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정말 이제는 저 세상으로 가도 괜찮다고 생각 했다. 병원 다니며 치료 받는다고 아스팔트 위를 왔다 갔다 하다가 죽기는 싫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흙을 좀 밟고, 산속도 거닐고 자연 속에서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주도로 내려 온 것이다.

제주도에는 내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 가끔 들르던 중문단지 풍림빌리지에 연립주택 하나가 있었다. 수술을 마친 나는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거기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매일같이 산에 올라 다니면서 운동량을 조금씩 늘려 나갔다. 그 후 몸이 점점 회복되어 골프도 나인홀 정도를 치게  됐다. 건강이 좋아지면서 직접 차도 몰 수 있게 됐다. 좋은 공기 마시며 산에 왔다 갔다 하고 슬슬 운동도 하다 보니 어느 틈엔가 나도 모르게 생존율 10%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항암치료까지 거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암에 좋다는 민간요법을 소개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런 것일수록 값은 비싸기 마련인데, 그래도 가족들은 이런 것들을 사가지 왔다. 물론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편을 어떻게라도 살려야 하니까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번은 아내가 200만원을 주고 러시아산 차가버섯을 사 온 적도 있다. 이것을 내가 먹으면 다른 것도 사서 가져오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비싸게 구입한 그 차가버섯을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내도 내 강한 의지에 지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누가 무어라 해도 사들고 오지 않았다.

사람이 살려고 발버둥을 치면 오히려 쉽게 죽게 돼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게 되면 오히려 살아나게 된다. 그러니 우리들은 너무 집착하지 말고, 과감하게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의 경우도 “정말 죽어도 좋다”하고 마음을 탁 비우니까 살아난 것이다. 사즉필생(死則必生). 이 말은 죽을 병에도, 사업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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