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급보증으로 얻어낸 금융 지원

▲ 박종규 회장
그러나 문제는 P기업이 지급보증을 해주는 대신 우리에게 제시한 조건이었다. 지급보증을 해주는 조건으로 우리 회사의 주식 전체를 자기들에게 맡기라는 것이었다. 또한 증자도 임의로 할 수 없고 자금이 필요할 경우 반드시 P기업으로부터 빌려야 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한 마디로 지급보증을 해 줄 테니 회사를 통째로 맡기라는 것이었다. 이는 여차하면 회사를 빼앗아 버리고 계열화시키겠다는 것이나 진배없는 얘기였다. P기업으로서는 잘만하면 이번 기회에 부가가치가 높을 것으로 보이는 케미컬 운송 사업에 진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여차하면 회사가 대기업에 넘어가는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자금이 없는 상태에서 사업을 막 시작하려는 우리로서는 다른 방도는 찾기가 어려웠다. 나는 매우 위험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혹 잘못되더라도 한국 기업의 사업으로 계속되기만 한다면 국민 경제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겠는 가’하는 생각에서 P기업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단을 내리고 후속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회사 설립 자금 3분의 1을 출자해 주신 이맹기 사장님의 최종 허락을 얻어서 마침내 P기업의 지급보증을 받아낼 수 있었다.

1970년 6월말에 열린 도쇼쿠의 이사회에서 우리 회사에 대한 금융지원 방안이 논의돼 민간기업의 지급보증을 바탕으로 우리 회사에게 금융지원을 해주는 방안이 원안대로 가결됐다. 이 결정을 나에게 전해 주는 도쇼쿠의 야스다 전무는 본인이 더 흥분해 뛸 듯이 기뻐했다. 끈기 있게 매일 출근해 열의를 다하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직원들도 정말 기뻐해 주었다.

직원들은 나를 초청해 밤늦게까지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다. 이사회에서 금융지원이 결정된 그 날은 정말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 축하 파티를 마치고 새벽 2시에 하숙집으로 돌아오다가 나는 어느 전철역에선가 내려서 미친 사람처럼 ‘하하하’ 큰 웃음을 터트렸다.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실성한 사람으로 생각했겠지만 그 한바탕의 웃음으로 그동안의 고생을 날려 보냈던 것이다.

첫 선박 제1케미캐리호를 들여오다

일본에서 선박도입 계약을 했고 금융지원도 얻어냈으니 우리가 계약한 제7교쿠호마루호를 부산항으로 끌고 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예상은 빗나갔다.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생겨 제7교쿠호마루호를 끌고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7교쿠호마루호는 일본 내항선으로 일본내항탱커조합에 소속된 배였다. 그런데 일본 내항탱커조합의 규정에는 ‘조합 소속의 선박은 건조한지 1년 이내에 다른 회사에 양도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어서 제7교쿠호마루호의 매각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일본 운수성 법규에도 ‘모든 선박은 운수성의 양도 허가를 받아서 수출할 수 있다’고 돼 있어서 운수성 측도 조합에서 반대하므로 양도허가를 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내항탱커조합의 규정과 운수성의 법규에 걸리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지 않으면 제7교쿠호마루호를 도입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1970년 7월 10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경에 있는 선주인 오리다씨와 도쇼쿠측, 그리고 나, 이렇게 3자가 미팅을 가졌지만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고 우선 내항탱커조합과 운수성을 각자 설득해 보자는 정도만 합의하고 헤어졌다. 하는 수 없이 선박도입 계약은 해약을 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

하지만 운수성 법규는 3자 회의가 열리기 불과 몇 주일 전인 6월 15일에 개정돼 “500톤 미만의 선박은 운수성의 양도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명시돼 있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따라서 499톤인 제7교쿠호마루호는 사실은 운수성에 양도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는 선박이었다.

운수성 규정이 개정된 사실은 내가 우연히 히비야공원에 있는 정부간행물센터에 들렸다가 알아낸 것이다. 해운과 선박에 관한 법률이 나와 있는 책에서 수출 관련 조항을 찾아보고 있는데 간지로 끼어 있던 개정 조항이 툭 떨어지는 바람에 법규가 개정된 사실을 알게 됐다. 정말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개정 규정을 근거로 통산성에 수출면장을 요청해 수출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내항탱커조합을 설득하기로 했던 오리다씨는 나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자세에 감동했음인지, 내항탱커조합의 처벌을 감수하기로 작정하고 배를 나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렇게 제7교쿠호마루호는 1970년 8월 13일 일본 오노미치항을 출발해 광복절인 8월 15일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 선박이 우리 회사의 첫번째 사선인 제1케미캐리호다.

이맹기 사장님과 김영선씨의 恩功

도쇼쿠측은 고맙게도 약속한 선박대금 외에도 각종 준비금과 운영 자금까지도 융자를 해주었다. 그에 따라 나는 며칠 더 동경에 머무르면서 사업상 꾸었던 돈들을 모두 갚고 신세를 졌던 사람들에게 인사치레를 했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들에게 줄 선물까지 사들고 8월 20일, 일본으로 출장 간지 무려 8개월만에 서울의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의 옷차림세도 일본으로 떠날 때 입었던 그 동복(冬服) 한 벌을 걸친 그대로였다. 단돈 100달러를 들고 일본을 갔던 내가 선박 도입 자금에다가 보험료, 선박검사비, 항비까지 마련하고 게다가 애들 선물까지 사들고 돌아온 것이다. 내 스스로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에 비행기 안에서 혼자서 싱글벙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불가능한 것 같은 일을 뚝심으로 밀고 나가 끝끝내 해 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쾌거는 나의 엄청난 고뇌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이맹기 사장님과 절친이었던 해운공사 동경지점의 김영선씨 도움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보험 가입을 하고 자살해 보험금이 나오면 그것으로 배를 사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던 내가 술에 취해 김영선씨에게 그런 생각을 털어놓았던 모양이었다. 김영선씨는 그날 밤늦게 한국에 계시는 이맹기 사장님에게 전화를 해 “박종규가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아 불안하다”는 얘기를 했고 이맹기 사장은 바로 도쇼쿠의 야스다 전무 집에 전화를 걸어 “보증이 없어 차관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젊은 사람의 장래가 위험하니 한 가지만 부탁한다. 무슨 방법이든지 그를 한국행 비행기에 태워 보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이 말이 야스다 전무의 심금을 울려 어떻게든지 해주자는 방향으로 방향이 바뀌게 된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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