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로운 스타트, 가스 수송에도 나서

▲ 박종규 회장
우리 사업은 처음부터 좋은 실적을 올렸다. 우리가 도쇼쿠측에 제출한 사업계획서에는 사업 초년도에 월 5항차를 운송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사업이 순조로운 바람에 실제로는 월간 6~7항차까지 수송하는 등 목표를 초과달성하고 있었다. 주요 운송항로는 일본의 미즈시마와 한국의 마산항을 왕복하는 항로였는데 이 항로를 4.5일마다 1항차씩 뛴 셈이었다. 배에서 짐을 내리고 싣는 데만 하루가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한 달에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배를 가동한 셈이었다. 당초 계획에 비해 140% 이상의 실적을 올린 것이다.

이러한 실적은 선원들의 노력의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에 나는 우리 회사 선원들에게 절대로 밀수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 대신에 상여금을 550%까지 주었다. 당시 재벌급회사의 상여금이 200%선이었으니 매우 높은 상여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업이 호조를 보이면서 첫 번째 도입선박인 제1케미캐리호의 선가는 차질없이 갚아나갈 수 있었다. 수송실적이 쌓여감에 따라 우리는 케미컬화물 운송에 자신감을 갖게 됐고 그에 따라 다른 종류의 새로운 화물 수송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때 검토한 화물이 PVC 원료인 VCM, 부타디엔, 포로필렌옥사이드 등과 같은 케미컬 가스였다.

우리는 우선 VCM을 수송하기 위해 1096톤급 제1LP호를 일본에서 들여왔다. 제1LP호는 일본 저팬라인의 자회사에서 운항하던 선령 12년짜리 배였는데 우리가 1년 6개월 용선한 다음에 선가분할상환 방식으로 도입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 배는 1971년 6월 12일 도입돼 1년 반 후에는 한국국적을 취득하게 됐고 우리 회사의 두 번째 보유선박이 됐다.

절체절명 : P기업에 맡긴 주식 되찾아라

하지만 초기에 사업이 매우 순조로운 상태에서도 우리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지급보증을 서준 P기업에 담보로 우리 회사 주식 100%를 맡겨 놓았기 때문에 회사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다행히 사업은 2차년도까지 아주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사업이 잘될 때 P기업으로부터 주식을 찾아와 경영권을 튼튼히 해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대기업인 P기업이 순순히 주식을 돌려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P기업은 첫배 도입을 위해 지급보증을 해 줄 때부터 호시탐탐 우리 회사를 점령하려고 했고, 경영에도 간섭하겠다는 뜻을 노골화했다. 일본에 가서 악전고투 끝에 첫 번째 선박 도입에 성공하고 한국에 돌아온 1970년 8월 20일, 내가 가장 먼저 접한 소식은 “P기업이 자사 임원 중 한사람을 이미 우리 회사 사장으로 내정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어서 P기업측은 우리가 쓰고 있던 광일빌딩의 사무실을 P기업이 들어있는 빌딩의 사무실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100% 주식을 가진 P기업의 요구는 요구가 아니라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전작에서 밝힌 것처럼, 사무실 이전을 요구 받던 날 밤에 나는 P기업 H상무의 집을 찾아가 “P기업의 그늘에서 열심히 일할 터이니 잘 돌봐 주십시오”하고 부탁을 함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키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납작 엎드려 그들에게 복종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P기업은 더 이상은 사장 임명 얘기도 하지 않았고, 사무실을 옮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P기업의 계산은 우리들이 선가상환을 하지 못하거나 경영이 어려워져 운영자금이 부족하게 되면 그것을 지원한다는 빌미로 회사를 자연스럽게 흡수합병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코리아케미컬캐리어스는 도쇼쿠측과 계약을 할 때 3년만에 선가를 다 상환하기로 계약을 했으나 신생기업이기 때문에 3년안에 선가를 모두 상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상환기간을 한 번 더 연장하게 되면 그 기간이 6년까지 늘어나게 되는데, 그동안에 회사에 변고가 생기거나 경영이 어렵게 되면 P기업은 자연스럽게 흡수합병에 나설 것이라는 뜬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P기업으로부터 우리의 주식을 모두 찾아오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으나, 그 방법은 묘연했다. 제일 좋은 방법은 도쇼쿠사가 지급보증 자체를 해지하게 하는 방법이었으나 우리측의 해지 요구를 도쇼쿠측은 단호하게 거부해 버렸다. 이미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기 때문에 선가를 모두 상환할 때까지는 절대로 지급보증을 철회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절박한 상황에 몰린 나는 “허위 문서라도 만들어 주식을 되찾아 오자”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1971년 8월에 나는 P기업측에 도쇼쿠사 명의로 돼 있는 공문을 들이밀고 주식 모두를 반환해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지급 보증을 해지한다는 내용의 이 공문은 완전히 위조된 공문이었다.

공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했는데, 역시 예상대로 P기업 경영진들은 사실 여부를 따져보지도 않고 공문을 보고 크게 실망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후로는 시간을 끌기 위해 주식 반환을 요구하는 우리와의 만남을 피하기 시작했다. P기업의 P회장은 어떤 공식 연회석상에서 나와 마주쳤으나 나를 발견하자마자 얼른 몸을 피하기까지 했다.

몇만 달러만 주고 다시 회복한 소유권

나는 다시 한 번 P기업에 공문을 보냈다. 공문 내용은 제1캐미캐리호 도입에 협조해준 P기업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과 함께 “조만간 주식을 모두 돌려 줄 것으로 믿고, 그 답례로서 선박의 50%에 해당하는 소유권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주식을 모두 돌려받는 대신에 선박 소유권 50%를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자산을 절반 넘겨주고라도 주식을 되찾아 와서 경영 안정을 이뤄야겠다고 생각에서였다.

P기업은 일단 이런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주식의 50%는 당분간 우리가 계속 갖고 있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사례금을 받아가면서 다시 거기에 담보를 잡겠다는 것이니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에 주식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였던 우리로서는 이런 요구사항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식의 50%가 P기업에 볼모로 잡혀 있는 한에는 안정적인 경영을 할 수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계속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회사 경영이 조금이라도 어려워지면 P기업이 가지고 있는 주식이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이런 불안한 상황은 1973년에 선가 상환이 끝날 때까지 지속됐다.

1973년 8월에서야 마침내 제1케미캐리호의 선가상환이 3년만에 완료됐다. 당당히 한국 국적선으로 등록을 하게 된 것이다. 만약 선가상환을 완료하게 되면 지급보증은 끝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됐던 주식 50%는 당연히 우리 회사에 돌려줘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P기업은 주식을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더욱 강한 요구를 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선가 상환이 끝나는 시점을 얼마 앞둔 7월말에 나는 P기업측에 공문을 보내 선박 소유권 50%를 주는 대신에 “제1케미캐리호를 국적선으로 들여오는데 따른 관세와 선박 소유권 50%를 증여하는데 따른 증여세를 내달라”고 요구했다. P기업측은 선박 소유권을 50% 확보하는 것은 좋으나 관세와 증여세를 물어내면서까지 선박 소유권을 가져온다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였을 것이다. P기업은 우리의 이러한 요구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으나 결국에는 50%의 소유권을 주는 대신에 현금으로 X만 달러만 달라고 요구해 왔다. 이것이 내 평생의 유일한 비자금이었는데, 보증료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 해 X만 달러만 주고 회사 주식 100%를 찾아올 수가 있었다.

나는 주식을 찾아오자마자 이맹기 회장님을 찾아가서 회장님의 주식을 돌려드렸다. 이맹기 사장님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불가능한 일을 해냈구먼”하면서 아주 감격스러워 하셨다. 내가 처음으로 이맹기 사장님의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여러 가지로 응원을 해준 이 사장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을 한 것 같아서 매우 기뻤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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