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욕심, 조선소 건설에 나서다

▲ 박종규 회장

어떤 기업이든 사업이 잘 되게 되면 새로운 부문에 진출해 회사의 덩치를 더 키우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만약에 새로 진출한 부문에서도 성공을 거두면 그 회사는 그룹회사로 발전할 기회를 잡는 것이지만, 자칫 실패를 하게 되면 기존의 사업까지도 치명타를 입는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 사업 초기부터 순풍에 돛을 단 듯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우리 회사도 이즈음에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먼저 검토했던 사업은 석유화학 제품을 저장할 수 있는 ‘탱크 터미널’ 사업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부두에 저장 시설이 크게 모자라 케미컬화물을 싣고 들어온 선박들이 짐을 부리지 못하고 외항에 대기해야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우리는 탱크 터미널사업에 진출하기로 하고 터미널 건설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가 1975년 3월에 매입한 땅이 울산항에 있는 1만 4880평 부지였다.

그러나 우리의 사업 구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거대해져 갔다. 처음에는 탱크 터미널 사업을 할 생각이었지만, 이 계획이 어느 틈엔가 케미컬 탱커를 짓는 조선소를 건설하자는 쪽으로 확대가 돼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탱크 터미널 사업은 터미널 공사 기공식까지 마친 상태에서 그대로 중단 상태에 빠져버렸다.

당시 우리나라 선사들이 케미컬 탱커를 확보하려면 일본에서 신조하거나 일본에서 쓰던 중고선을 도입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우리나라 조선소에서는 코팅 등 특수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에 케미컬 탱커를 신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케미컬 탱커와 같은 특수선을 건조하는데 성공하면, 잠수함과 같은 정말로 특수한 선박도 건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야심찬 꿈을 꾸게 됐다. 내가 생각한대로 사업이 잘 된다면 우리는 케미컬 탱커와 관련되는 조선소와 터미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실제로 운송도 하는 대기업이 되는 것이었다.

잘못된 인사정책이 빚은 참사

우리의 조선소 건설 계획은 이미 1974년부터 실행에 옮겨졌다. 그해에 우리 회사의 전액 출자로 ‘동해조선’이 설립된 것이다. 우리는 곧바로 조선소 부지로 울산시 용잠동 일대의 토지 4만평을 매입하고 이 부지의 앞바다 1만평을 매립해 조선소 건설을 시작했다.

우리가 처음에 건조한 선박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자체 발주한 제17케미캐리호와 제18케미캐리호 2척이었다. 이 선박들은 1976년과 1977년에 각각 완공돼 성공적으로 인도됐다. 첫 번째 사업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성공적인 출발이었다.

하지만 희망에 부푼 우리에게 큰 타격을 주는 대형 악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독일에서 3500dwt급 컨테이너선 6척을 한꺼번에 수주하게 됐는데, 이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함으로써 모기업까지도 뒤흔드는 엄청난 사태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동해조선의 경영이 어렵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인사정책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조선분야는 나의 전공이 아니므로 조선을 전공한 사람을 CEO로 영입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외국에서 조선학을 전공한 C씨를 초대 사장으로 모셔왔다. 그리고 임원진도 서울대 조선학과를 나온 우수한 인재들로 구성했다. 작지만 강한 기업을 만들려면 처음부터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나의 생각은 판단 미스였다. 조선소를 경영하는 것과 조선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는데, 조선에 대한 설계 디자인을 잘 하는 사람이니까 경영도 잘 할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사실 C씨를 사장으로 영입하는데 대해 우리 회사의 주주이자 후원자였던 이맹기 당시 대한해운 사장은 강하게 반대를 하셨다. 이 사장님은 거듭 반대를 하시다가 내가 “이미 사장 자리를 제안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승낙을 하셨다. 계속 반대를 하신 이유는 조선소까지 내가 책임 경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봤기 때문으로 생각이 되는데, 나중에 보니 이러한 이 사장님의 판단은 그야말로 선견지명(先見之明)이었다.

C씨는 내가 대한해운공사 조선과장 시절에 선박 신조의 감리 용역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는 내가 ‘우리사주조합’ 운동을 할 때 ‘중앙일보’ 광고비까지 내줬으니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C씨의 사장 영입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그 때의 그 고마움에 조금이라도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C사장이 선임돼 첫 출근을 한 날 세 가지의 경영지침을 그에게 제시했다. 첫째 당분간 스크랩(선박해체)에 전념하면서 시간을 두고 기술을 축척해 나갈 것, 둘째 수리업을 중심에 두고 신조사업은 모기업의 발주분만 할 것, 셋째 사람을 많이 쓰지 않도록 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독일 선사로부터 6척을 무리하게 수주함으로써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적재톤수 잘못 계산, 큰 손해 보는 계약

독일 선사로부터 6척을 수주한 것은 최종적으로는 나의 책임이었지만, 사실 나로서도 항변을 하자면 이상하게 일이 꼬이게 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독일 선사가 발주하려고 한 선박은 3500dwt급 컨테이너선 6척이었다. 이것을 일본의 우스키조선소에서 척당 410만 달러에 건조하는 것으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을 현지에 출장 중이던 C사장이 10%가 낮은 370만 달러를 제시해 수주에 성공했다고 전보를 보내온 것이다.

해외 수주는 하지 말라는 경영지침까지 내놓았던 나로서는 해외 선주로부터의 수주가 원칙을 깨는 일이라서 께름칙했지만, 선가가 적재 톤당 1000달러 정도여서 꽤 괜찮은 선가라고 생각됐다. 더구나 출장을 간 사이에 갑자기 아들이 죽는 바람에 애통해 하는 C사장이 애써서 수주한 것을 허사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반대하기가 어려웠다. 계약 내용을 꼼꼼히 살피지도 않고 묵인해 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나중에 결국 밝혀진 사실이지만 독일선주와 맺은 계약은 적재톤수를 잘못 계산해 큰 손실을 보는 계약이었다. 우리가 계약한 것은 적재톤수 3500톤이었지만 상갑판의 적재톤수를 뺀 소위 OSD(Open Shelter Decker)이고, 이것을 상갑판 윗부분까지 넣은 CSD(Closed Shelter Decker)로 계산하면 5000톤이 넘는 것이었다. 유럽선주들이 OSD로 표기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3500톤으로 수주한 선박이 실제로 지어놓고 보니까 적재톤수가 4333톤이나 됐다. 고스란히 손해가 날 수 밖에 없는 선박을 건조하기로 계약을 했던 것이다.

당시 선가를 제시하는 방식도 완전히 주먹구구식이었다. 일본 조선소가 제시한 가격에서 무조건 10% 깎아서 제시를 했으니 말이다. 일본조선소가 제시한 410만 달러도 싼 가격이었는데, 그것을 다시 10%나 깎았으니 손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계산해 보니 우리가 계약한 대로 선박을 건조하면 척당 150만 달러, 합계 900만 달러가 손해가 나는 가격이었다.

건조작업도 너무나 어려웠다. 계약에 따라 선용품은 모두 유럽에서 가져다 써야 했으므로 그 비용을 감당해 내기 어려웠고 독일선사의 감리가 너무나 까다로워 수시로 작업이 중단됐다. 작업 중단과 재작업이 반복되면서 工期는 계속 늘어났고, 인건비 부담은 가중됐다. 이에 따라 동해조선은 운영자금이 바닥이 났고 모기업인 한국케미컬해운에서 급한 대로 가져다 쓰는 처지가 됐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