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호(한일상선 사장)

나는 그의 정식 이름, 소위 풀 네임을 모른다. 성인지 이름인지 구분 없는 ‘미스터 딘’만으로 그를 부르면서 지금껏 지내왔다. 그러나 하등의 불편은 없었고, 단음절 호칭에의 정감이 오히려 오롯했다.

이름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서양인 치고는 작은 키에 숱이 많은 은발을 올백으로 빗어 넘긴 외양이 나보다는 꽤 연상으로 보이는 그의 나이며 학력, 유럽 쪽 혈통도 모른다. 흔히 이런 것들을 인적사항이라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옷매무새만큼도 그를 대변하지 못 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내가 근무하던 해운공사의 호주 대리점 사장이었다. 시드니에 본사를 두고 열일곱 항구에 사무소를 유지하면서 입출항 선박들의 수속이며 하역, 수선, 보급 등 항만업무 전반에 선주(船主)를 대행하는 해운 대리점의 대표이사였다.

그와의 본격적인 만남은 내가 본사의 영업과장으로 부임한 직후부터였다. 직전까지 호주/포항 간 석탄운송선의 선장으로 승무하면서 시드니에서 두어 번 만났던 안면의 연장이었다. 그는 해마다 연말의 정례방문을 포함해서 서너 차례씩 서울을 다녀갔고, 나는 그런 그의 자투리 여가를 민속촌이나 인천의 갑문식 도크로 안내하면서 가까워진 사이였다. 그러나 그와 나의 만남이 사뭇 평탄하지는 않았다.

내가 해운공사를 그만둔 것은 40년 전통의 국적 최대 해운회사가 어느 재벌 소유의 군소 선박회사로 흡수되면서 이름까지 바뀐다는 절차에 대한 내 자존심의 반발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해상과 육상을 넘나들면서 여념이 없었던 이십 년의 인연을 스스로 외면하는 비애였다. 그러면서 맨땅에 새로운 생업을 일궈야 한다는 당혹이자 고뇌였다.

그가 내 자영(自營)의 사무실로 찾아온 것은 내가 삼 년여의 각고 끝에 그런대로 안정을 찾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그가 반갑고 고마웠다. 그러나 한편, 그를 까맣게 잊고 지낸 그간의 내 박정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러나 이제 시간만은 넉넉해진 나와 그의 재회는 이전보다 여유로웠다. 그는 서울의 거래처들을 방문하는 출장마다 내 사무실을 찾아들었다. 급기야 출장업무 말미에 사나흘의 여유를 달고 와서 나를 제주도며 경주, 설악산까지 길잡이로 몰기도 했다.

그렇게 또 십여 년을 지냈을 때였다. 그가 내 연배쯤의 한 사내를 데리고 나타났다. 자신은 이제 회장으로 비켜 앉으면서 동반의 사내가 사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사내는 나를 자기네 한국대표부로 계약하고 싶다면서 내 의향을 살폈다.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다. 동양의 가치관으로는 우정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으며, 설사 그래봤자 내가 지금보다 달리 그들을 도울 일이 없다고 설명했다, 사실 나는 그때껏 그들의 거래처 확보며 관리에 내가 할 만한 조력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 그러자 그들이 정색을 하며 나섰다. 지금까지의 내 역할만으로도 자기들의 고만한 성의는 도리라면서 집요했다. 결국은 조항 일체를 그들에게 일임하면서 계약에 응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한국 대표부 간판을 내 사무실에 달면서 함께 축배를 든 얼마 후, 미스터 딘의 부음이 날아왔다. 청천의 벽력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전(弔電) 한 장을 달랑 띄워 보내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바로 답전이 왔다. 자신들의 슬픔에 같이해줘서 고맙다면서 조의금은 사절한다는 것. 굳이 보내려면 호주국립암센터를 추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를 잊으며 두어 해를 지냈을 때였다. 매월 20여 척의 운항선박을 호주에 기항시키는 국내 굴지의 해운회사를 그들의 거래처로 연결시킬 기회가 있었다. 그들 간의 계약이 성사되면서 앞으로의 업무 협의차 그들 일행이 서울을 방문했다. 사장과 매니저, 여직원이었다.

선주 회사와의 공식 일정을 마친 그들 세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더니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했다. 내가 봐도 그들은 낮의 돌격회의와 밤의 위하여 술자리에서 연일 휘둘렸을 터였다. 개안택시 기사에게 의뢰했더니 영동대교 남단의 소형 호텔 지하층으로 안내했다. 서양식에 위스키와 와인을 즐길 만한 분위기의 무도장 겸 유흥주점이었다.

남자 둘에게 댄서를 붙여 내보내면서 여직원은 나의 상대였다. 독일계라는 그녀의 명함에는 가브리엘 뭐라는 이름이었지만 일행은 그녀를 ‘개비(Gabby)’라고  불렀다. 나보다 훌쩍 큰 키에 골격이 두툼한 그녀와의 서투른 춤이란 피차에 모양새가 없는 일이어서, 그녀와 나는 춤 대신 생맥주 머그잔을 양껏 맞대기로 했다.

내가 미스터 딘을 회상하자, 그녀는 자기 어머니의 남편이라고 받았다. 무슨 난센스의 재치인가 하면서, 네가 딘의 딸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 했다. 독신으로 지내던 미스터 딘이 시한부의 생명을 선고받자, 그곳 암센터에서 자원봉사 중이던 그녀의 어머니가 그와의 결혼을 감행한 일이라 했다. 그의 마지막 길에 고독과 고통을 쓰다듬으면서 함께하겠다는 작심이었다. 그들 서구인들의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이라 하더라도 나로서는 아리송한 이야기였다.

재산을 암센터에 기증한 미스터 딘과 그녀의 어머니가 호주의 남쪽 타스마니아에 신혼(?)의 보금자리를 차렸다고 했다. 그들 회사의 컨테이너 운반선이 정기적으로 드나들면서 지구상 공기가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진 섬이었다. 그러나 의술의 예측은 정확해서, 그곳의 밝은 햇살과 고운 별빛 속에서도 그들의 시간은 반년여가 고작이었다.

남편의 시신과 함께 시드니로 돌아온 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자원봉사 중이라 했다. 하나로는 남아도는 시간과 활력이 아까워서 복수의 봉사에 여생을 쏟아 붇는다고 했다. 이 또한 나로서는 놀라운 그들의 삶이었다. 그러면서, 연인의 전송을 받으면서 남극양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간 미스터 딘의 마감이 멋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들 일행이 호주로 돌아간 직후였다. 미스터 딘의 미망인, 즉 개비의 어머니가 봉함카드 한 장을 보내왔다. 생전의 미스터 딘이 시드니 외항의 수평선을 배경으로 자기회사 상선의 뱃전에 기대어선 흑백 음영사진 아래로 옅은 금박 글귀였다.

“우리의 미스터 딘은 고통에서 해방되었을 뿐, 죽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늘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는 언제나 그와 함께 생활한다.”

그런 뒷장에는 딘 부인 (Mrs. Dean)의 펜글씨였다.

▲ 김문호

“내 딸의 한국방문을 계기로 당신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내 남편 미스터 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던 날, 당신이 보내준 애도와 위로에 재삼 감사드립니다. 그는 자택으로까지 자신을 초대해주었던 당신의 호의를 늘 고마워했고 당신이 소개한 한국의 역사와 풍물들을 대견해했습니다. 이로서 당신은 그를 잊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일원이 되기에 자격이 충분하므로 이 추모카드(Memorial Card)를 드립니다.”

그러고 얼마 전 세모에는 개비 양의 소식이었다. 자기 어머니도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미스터 딘과 나란히 누웠으며, 자신은 다가오는 봄에 결혼을 해서 유럽으로 이주한다고 했다. 그녀 혈통의 고향인 독일의 어느 작은 항구도시가 새로운 보금자리라면서 내게 오래오래 건강하시라는, 아마도 미스터 딘과의 이승 인연의 마지막 잎새일 것만 같은 성탄카드 겸 연하장이었다.(1611)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