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관리 받는 동해조선 경영에만 전념

▲ 박종규 회장

홍윤섭 행장의 부탁을 받고 나니 다시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그 길로 정부청사로 달려가 상공부 장관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비서는 장관이 외국의 경제사절을 면담 중이라며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그 비서는 “이번 주 안에는 스케줄이 꽉 차서 도저히 면담 일정을 잡을 수 없다”고 그 주에는 면담이 불가하다고 밝혔다.

하는 수 없이 장관실을 나온 나는 정부청사 중앙계단에 멍하니 서서 그저 신세한탄만 하고 있었다. 돌아가기 위해 차를 불렀는데 이상하게도 한참이 지나도 차는 오지를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 옆으로 키가 작은 사람이 다가왔다. 바로 내가 만나려던 최각규 장관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얼른 인사를 드리자, 최장관은 대뜸 “어떻게 됐어?”하고 조선소 매각 문제를 물어왔다. 장관실에서 못한 면담이 정부 청사 중앙계단에서 마주 선채 이뤄진 것이다. 나는 “몇 군데 더 매수자를 알아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제는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저 한사람이 끝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 조선업계가 큰일입니다”라고 심각하게 말했다.

최 장관은 내가 “예수는 자기가 만든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라는 말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를 밝히자, 갑자기 생각이 난 듯 “그래 당신이 하면 되겠구먼”하면서 은행관리를 암시하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옆의 비서에게 “신탁은행장에게 내가 좀 만나잔다고 해”하고는 기다리던 차를 타고 휙 떠나버렸다. 내가 부른 차는 그 후에야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이상하게 길이 막혀서 빨리 올 수가 없었다고 해명을 했지만, 나는 늦게 와준 운전기사가 너무나 고맙기만 했다.

결국 그 주 토요일에 최 장관과 신탁은행장이 만나서 동해조선의 은행관리를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월요일이면 부도가 날 회사가 일단은 한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이것이 1978년 여름의 일이었다. 동해조선의 은행관리가 결정된 8월 31일 나는 모회사인 ‘한국케미컬해운’의 사장직을 사임하고 동해조선의 경영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한국케미컬해운의 후임 사장직은 당시 부사장이었던 강병연씨가 승계했다. 나는 동해조선이 재건되지 못하면 빚보증을 선 모회사도 파산에 이를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동해조선 살리기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동해조선은 은행관리를 2년 반 정도 받게 됐다. 동해조선의 경영 정상화에서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합리적으로 인원을 감축할 수 있느냐 하는 조직 정비의 문제였다. 독일 선주의 배 6척을 수주한 문제는 재협상으로 타결할 생각이었지만 인원을 줄이는 문제는 쉽지 않아보였다.

이 때 내가 생각해낸 것이 크레인에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모든 직원들의 헬멧에 일련번호를 붙이게 하고 몰래 크레인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밑을 내려다 본 것이다. 올라가서 살펴보니 노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잠을 자는 사람조차 있었다. 이런 사람들의 번호를 다 적어 두었다가 조회시간에 이것을 전해주면서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일하지 않는 사람만 족집게처럼 찾아내서 회사를 그만 두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해 6개월만에 종업원 수를 1200명에서 600명으로 절반을 줄일 수 있었다.

조업시간도 문제였다. 직원들이 너무 늦게 출근해 점심이 가깝도록 업무가 시작이 되지 않는 경우조차 있었다. 이것은 부서별로 전기사용량을 측정해 의식적으로 체크하고 있다는 것을 소문냄으로써 해결했다. 매일 매일 전기사용량을 부서별로 체크하니 출근시간이 8시까지로 앞당겨져 용접 작업 등 업무에 빨리 투입이 될 수 있었다.

모회사까지 넘기려고 한 은행의 계획

독일 선주의 배 6척은 인도가 상당기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영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독일 선주는 지체보상금을 청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2호선, 3호선은 각각 선가를 25만 달러, 65만 달러씩을 높여주었다. 또한 나머지 배 3척은 아예 계약 자체를 취소해 주기까지 했다. 물론 이것은 처음에 계약한 선가가 너무 낮아서 선가를 맞게 조정해 준 측면도 있지만, 독일 선주들은 동해조선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인정해 준 덕분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독일을 포함, 유럽 선주들의 배를 짓는 데 자신이 생겼다. 이후에 우리는 유럽 선주들을 중심으로 수주활동을 맹렬하게 전개했다. 그 결과 싱가포르의 스킨디아 에사르(Scandia Essar)사로부터 6700dwt급 정유운반선 4척을 1948만 달러에 수주해 착공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선주 볼텐(Bolten)사로부터 1만 4200dwt급 컨테이너선 4척을 척당 1045만 달러, 모두 4180만 달러에 가계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배는 은행의 환급보증금만 받으면 완전히 계약이 성립돼 회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됐다. 마침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석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벌크선의 경우는 선박 수주가 용이한 상황이었다. 이런 추세라면 동해조선의 부채 100억원 정도는 3년내에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해조선 재건의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서울신탁은행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계약의 수익성과 축적된 기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해도 은행측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경영진을 못 믿겠다는 눈치였고 가능한 빨리 대기업에다가 동해조선을 팔아넘겨야지 안심이라는 생각인 것 같았다. 더구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새 정권이 들어선 이후 취임한 김용운 행장은 마지막으로 독일 배를 인도한 다음날인 1980년 9월 27일에 은행관리 종료를 선언해 버렸다. 그렇게 동해조선 재건의 희망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결국 서울신탁은행은 재무부, 상공부 등에 동해조선의 처분을 촉진할 것을 건의했고, 그에 따라 대한조선공사가 인수자로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대한조선공사는 당시에 적지 않은 부채를 가지고 있었으나 주거래 은행을 산업은행에서 서울신탁은행으로 옮기게 되면 새로운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동해조선을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자금지원을 받기 위해 인수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울신탁은행측이 동해조선을 대한조선공사에 넘기고 아울러 보증을 섰던 모기업인 한국케미컬해운까지 다른 해운회사에 넘기려고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1980년 12월 어느 날 느닷없이 범양상선의 한상연 사장의 전화를 받고서야 알 수 있었다.

한상연 사장은 서울신탁은행측에서 오라고 해서 갔더니 한국케미컬해운을 범양상선이 인수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하더라고 나에게 귀띔을 해주는 것이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대한조선공사가 동해조선의 채무 인수와 함께 미불이자 33억원도 함께 인수하는 것을 거부하자, 미불이자 33억원과 한국케미컬해운을 함께 묶어서 다른 해운회사에 넘기려는 생각을 서울신탁은행이 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