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 잃은 회한의 눈물, 삭발까지 단행

▲ 박종규 회장

동해조선을 포기하는 것은 이미 각오를 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모회사인 한국케미컬해운을 하루아침에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모회사만큼은 절대로 방어를 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다지고, 김용운 행장을 찾아갔으나 김행장은 역시 만나주지를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소문 끝에 김행장과 동향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라는 한 사업가를 비오는 밤에 자택으로 찾아갔다. 이날 난 이 김행장의 친구인 노신사에게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막말을 쏟아냈다.

“아무리 빚이 있었도 일생동안 일궈놓은 회사를 당사자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뺏어가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항의를 하다가 종당에는 “출근할 때 조심하라고 하십시오. 나중에라도 묘를 파서 뼈를 갈아먹을 것입니다” 등등의 막말을 해댔던 것이다.

이런 막말 파문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며칠 후 김용운 행장은 이맹기 사장을 오찬에 초대했다. 나는 이맹기 사장을 사전에 만나 오찬에서 말할 내용을 미리 조율했다. 이맹기 사장은 오찬에서 김행장에게 “동해조선은 넘길 테니 한국케미컬해운은 제발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결국 이맹기 사장의 중재안이 타결이 돼 동해조선만 처분하고 한국케미컬해운은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한국케미컬해운이 덤으로 넘어갈 위기는 이렇게 넘길 수가 있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80년 1월 28일 동해조선은 대한조선공사에 인수됐다. 동해조선의 부채 127억원은 조선공사가 인수하고 미불이자 33억원은 한국케미컬해운측에서 6년거치 6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인수하기로 해 매듭이 지어졌다.

나는 울산 현장에서 이임식을 하고 배웅해 주는 직원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뿌렸다. 기업을 잃은 회한의 눈물이라기보다는 애써준 직원들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는 참회의 눈물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나는 10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꺼내 물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삭발을 했다. 실패한 경영자는 물러나야 한다는 평소의 나의 소신을 지킬 수 없는 형편이라 삭발이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풀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해조선을 잃은 슬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다시 제2차 오일쇼크 이후 흔들리는 모기업 한국케미컬해운을 재건해야 하는 과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어닥친 불황 寒波, 사채까지 손대다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몰려오는 모양이다. 그래서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도 있는 게 아닌가 싶다. 1978년 12월 이란에서 회교 혁명이 일어나 호메이니가 집권하면서 시작된 제2차 오일쇼크는 삽시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유가가 급등하면서 석유 수요는 줄어들고, 석유제품 수요 또한 감소하면서 케미컬 수송 시장은 엄청난 불황에 빠져들었다.

석유화학 경기에 의존하고 있던 우리 회사도 최악의 경영실적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가 보유한 선박은 모두 27척이었는데 1980년대 초반이 되자 급격히 화물이 줄어들면서 울산항에는 항상 다섯 척 정도의 배가 묶여서 놀고 있는 상황이 전개됐다. 앞이 안 보이는 불황의 먹구름이 몰려온 것이다.

우리 사원들에게는 1979년부터 1984년까지 5년 동안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이다. 경영상태가 악화되면서 사원들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해야 했다. 1978년까지만 해도 상여금을 300~500%까지 지급한 우리 회사였지만 1980년과 1981년은 상여금이 200%로 줄어들었고, 1982년부터는 상여금 지급을 아예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더욱이 1982년부터는 월급도 제때 주기 어려워 2~3개월씩 연체되기 일쑤였다.

인건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선가 상환, 유류비 등 지급해야 할 어음이 줄줄이 찾아왔다. 은행 문턱은 점점 높아만 가고 급기야는 사채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물론 처음부터 사채를 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회사가 가지고 있는 돈이 될 만한 자산은 다 팔아서 운영자금으로 썼고, 그래도 안 되니까 당장 급한 대로 회사 임직원들이 사적으로 마련한 자금들을 빌려 쓰기 시작했다. 직원들에게 빚을 얻어 쓰던 것이 종당에는 사채에도 손을 대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늘어나는 사채의 부담을 이겨내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경영상황이 나빠지면서 우리 회사에 내분이 생긴 것도 큰 문제였다. 제2오일 쇼크가 일어나기 전인 1978년 초에 동해조선의 사업이 부진에 빠지자 동해조선에 지급보증 해주는 문제를 놓고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한국케미컬해운은 1976년부터 영케미캐리호와 벤추라케미캐리호 등 중형의 신형 선박을 건조하느라 힘이 부쳤는데 동해조선 사업의 여파까지 밀려들었기 때문에 경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위기 국면으로 치달았다.

경영 정상화를 위한 조치로 나와 이맹기 사장님의 주식을 파는 방안도 검토 됐지만, 결론적으로는 경영진이 총 사퇴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1979년 2월 19일 열린 긴급 중역회의에서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는데, 이는 경영을 쇄신하기 위한 것 보다는 더 이상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없다는 최악의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사가 계속 어려워지니까 기존 경영진들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 나는 모회사를 떠난지 6개월도 안돼 다시 돌아와 한국케미컬해운의 사태 수습도 책임을 지게 됐다. 나는 이후 적자에 헤매는 동해조선과 한국케미컬해운의 대표이사를 겸임하면서 악전고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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