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양소년단연맹 총재 정호섭(제31대 해군참모총장)

▲ 정호섭 총재

제5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성호 제독이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치하 진해에 있었던 조선고등해원양성소를 졸업한 소위 상선사관 출신 마지막 해군참모총장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해군사관학교 제1기인 이맹기 제독이 제6대 해군참모총장으로 부임한 이후 오늘날까지 해사 출신들이 해군참모총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성호 제독은 해군의 핵심가치인 명예, 헌신, 용기의 귀감으로 후배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다. 1944년 11월 조선고등해원양성소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일본에서 실습 중이던 이성호 제독은 해방을 맞아 귀국한 후 1946년 신생 대한민국해군에 참위(소위)로 입대한다. 그 후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인수하고 6·25전쟁 기간 중에는 PC-703 삼각산함, PF-66 함장 등으로 참전하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이성호 제독은 한국함대 부사령관(대령)으로서 최초의 해군사관생도 원양실습 지휘관의 임무도 수행했다. 그 후 제독(장성)으로 진급한 후 해군작전을 총 책임지는 작전참모부장 등 해·육상 각종 요직을 거친 후 여러 선배를 제치고 1960년 9월 소장으로 진급, 제5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됐다.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이성호 제독은 해군역사에 길이 남을 여러 가지 업적을 세웠다. 몇 가지 언급하면, 먼저 당시 문제가 많던 휼병사업을 철폐한 일이다. 당시 군은 어려운 국가살림 속에서 장병들의 복지를 위해 숯을 구워 팔거나 고철을 수집하여 매각하는 등 자체 돈벌이에 나섰는데 여기에 부정이 끼여 끊임없이 말썽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성호 제독이 부임 이후 이를 전격적으로 폐지한 것이다.

둘째, 인사혁신이다. 당시 해군장교는 바다와 배에 익숙한 Wet Navy와 함상경험 없이 창군초기 합류한 Dry Navy 두 분류가 있었다. 그 중 Dry Navy가 대부분 고위직에 있었고, Wet Navy, 즉 뱃사람들은 진급과 보직 등에서 밀려 있었다. 또 이성호 제독보다 진급이 앞선 선배들이 다수 해군에 남아 있으며 용퇴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이성호 제독은 ‘총장 임기가 끝나고 내가 해군을 떠날 때 모든 선배들이 다 같이 떠나고 해사 1기생들에게 해군을 맡기자’고 설득해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이로서 창군이후 문제가 되던 인사 적체 및 잘못된 인사 관행을 일소에 해소시켰다.

마지막으로 5·16혁명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끝내 혁명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일이다. 혁명이 성공 후 5·16 주체세력들이 이성호 제독에게 해군이 혁명에 가담하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함명수 당시 해군참모차장의 경질을 요구하자 이성호 제독은 총장직을 사임하겠다고 강경하게 맞서며 결국 함명수 제독을 지킬 수 있었다. 함명수 제독은 훗날 이성호 제독과 이맹기 제독의 뒤를 이어 7대 해군참모총장이 된다.

▲ 故이성호 제독

이처럼 이성호 제독은 해방, 해군 창설, 6·25전쟁, 5·16혁명 등 정치적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고매한 인격과 강력한 리더십, 그리고 철저한 원칙주의로 대한민국 해군을 이끌며 빛나는 업적을 쌓은 진정한 뱃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직 20년이 안되었다는 이유로 퇴직연금도 못받고 어려운 가운데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며 ‘해군은 참모총장 개인의 해군이 아닙니다. 해군은 여러분들의 해군이고 나라의 해군입니다. 나는 나라의 명령을 받고 지시된 기간 동안 해군을 관리할 뿐입니다’라며 후배들에게 교훈을 남긴 이성호 총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마지막으로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난 그의 항로에 안전항해를 기원하며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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