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 복귀 첫날부터 부도 위기

▲ 박종규 회장

내가 한국케미컬해운의 대표이사로 복귀해 첫 출근한 날은 1979년 2월 25일, 직원들 월급날이었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중역회의를 소집했는데 보고 내용을 들어보니 “바로 오늘 직원들 월급을 지급하면 회사는 부도가 난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이 정도로 경영이 악화돼 있는지는 정말 몰랐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대표이사가 처음으로 출근하는 날인데 직원들 월급도 못 주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우선 직원들 월급부터 지급하고 보자”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육상 직원들의 월급 2500만원을 일단 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문제는 오후 5시까지 돌아오는 어음 결제액 2500만원을 마련하지 못하면 1차 부두가 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중역들이 머리 맞대고 아무리 궁리를 해도 오후 5시까지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은행에서 대출을 새로 받거나 대출연장을 해야 했으나, 회사 경영사정이 나빠지니까 은행에 가봐야 문전박대 당할게 뻔했다. 게다가 기존 경영진이 물러나고 재편이 되면서 우리 회사가 위험하다는 소문까지 나돌아서 누구 하나 상대를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상업은행 서소문지점을 찾아가 이현기 지점장에게 솔직하게 “월급을 주느라 어음결제액 2500만원이 부족하다”고 얘기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이현기 지점장은 대뜸 “월급을 먼저 주신 것은 잘 하신 일입니다”라면서 나를 칭찬하고는, 담당직원을 호출해 “당장에 2500만원을 기표해 드리시오”하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회사가 아무리 어려워도 직원들의 월급은 먼저 챙겨주겠다는 나의 생각이 이 지점장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한국케미컬해운의 불황 극복기는 정말 여러 권의 책으로 풀어 써도 될 정도로 사연이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결국은 경영진과 직원들이 모두 함께 똘똘 뭉쳐서 위기를 극복해 냈다는 점일 것이다.

각고의 감축 경영, 16척 私船 팔아치우다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피나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팔아서 회사의 운영자금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사들에게 지급하던 자동차를 모두 처분하고 탱크터미널 사업을 한다고 사두었던 울산의 터미널 부지도 태영건설에게 매각했다.

사무실도 임대료가 비싼 극동빌딩에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허름한 빌딩의 사무실로 옮겨 임대보증금 차액을 직원들 월급에 보탰다. 새로 이전한 남도빌딩은 공평동에 있는 옛날 종로학원 자리인데 임대료는 극동빌딩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몇 개 있던 골프장 회원권도 이 때 한꺼번에 다 팔아치웠다.

하지만 이런 경비절감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근본적으로 심각한 불황 여파로 일거리가 줄어들었으므로 남아도는 선박을 처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하지만 선박을 처분하면 당연히 거기에 딸린 선원과 사무직원을 줄여야 하는 문제가 따르기 때문에 이 또한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부득이 선박을 처분하고 근무인원을 줄일 수밖에는 없었다.

이 때 종업원 수를 줄이는 난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바로 두만석 전무였다. 그는 해운공사 시절부터 나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나에게 동경에 잠시 갔다 올 것을 제안해 내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에 자신을 포함한 임원진들의 사표를 모두 받아서 나의 책상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정말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마운 일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영업과 자금 담당 임원만 남겨놓고 기타 임원들의 사표를 모두 수리했다. 또한 부장 이하 사무직 사원들도 15%를 감원했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때 회사를 위해 떠나 준 임직원들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침체에 빠진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두 가지의 대처 방안이 필요했다. 우선은 과잉상태에 있는 선박을 처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영업에 더욱 박차를 가는 것이었다. 우선 우리는 선박을 처분하는데 집중해 단기간에 많은 선박을 처분했다. 첫 번째 도입선박인 제1케미캐리호를 비롯해 10척의 중고선과 야심찬 꿈을 가지고 신조했던 영케미캐리호와 벤추라케미캐리호도 이 때 처분했다. 1980년부터 1985년에 걸쳐 이렇게 처분한 선박은 모두 16척이나 됐다. 그동안 이렇게 선박을 처분한 돈으로 연명하면서 불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배는 못 팔고 열사의 사막서 한달간 고생

이 당시 가장 어렵게 처분한 선박이 신조선으로 건조했던 벤추라케미캐리호다. 이 선박은 아랍에미레이트 도선사인 모하메드 압둘라씨가 사겠다고 해 내가 직접 아부다비로 날라 가 매각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모하메드 압둘라씨는 “매각 대금을 연불로 지급하면 안 될까요?”하고 가당치도 않은 얘기를 하거나 “은행에서 융자가 안나와서 그러니 며칠만 더 기다리라” 등 나를 완전히 기만하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는 사이 한 달 가까이 이 배의 매각 건 때문에 아부다비에 발이 묶이게 됐다.

마지막에는 모하메드 압둘라씨가 자본금 500만 달러짜리 회사를 합작으로 만들자고 제의를 해왔지만 자기들은 이 합작회사에 자본금을 한 푼도 대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 같은 제의를 딱 잘라 거부하고 그날 바로 짐을 싸서 귀국길에 올랐다. 45도가 넘는 중동의 뜨거운 여름철 한 달 동안에 내가 배운 것은 중동사람들과는 장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귀국하는 비행기는 동경을 거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였다. 열사의 사막 중동에서, 벤추라케미캐리호를 팔지도 못하고 한달 넘게 허송세월을 하고 오는 나는 동경에서 무조건 내렸다. 벤추라케미캐리호를 처음에 건조했던 오리다(織田)씨에게 이 선박을 다시 사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이것은 최후의 방법이었다.

벤추라케미캐리호는 영케미캐리호의 자매선이다. 이 선박은 오리다씨가 우리 회사에서 용선해 준다는 것을 조건으로 우리가 발주한 영케미캐리호의 뒤를 이어 발주한 선박이다. 그러나 건조 중에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포기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우리 회사가 오리다씨와의 인연을 생각해 매입해 줬던 선박인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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