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선주에게 다시 판 벤추라케미캐리호

▲ 박종규 회장

내가 기타규슈로 오리다 사장을 찾아가 다시 매입해 줄 것을 사정하자, 의외로 오리다씨는 선뜻 받아주었다. 하지만 간경화 증세로 누워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경영하고 있는 오리다씨의 아들은 “그럴 수 없다”며 딱 잘라 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리다씨도 아들의 완강한 거부에 매우 난처해하고 있었다.

아들의 뜻을 꺾지 못한 나는 하는 수 없이 동경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동경으로 돌아와 서울로 전화를 해보니 회사의 자금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파산의 위기감이 한층 더 고조돼 있었다.

오리다 2세를 설득해 배를 되사가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시 큐슈로 날아가 오리다선박을 방문했지만 또다시 거절당했다.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하고 돌아오는 심정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너무너무 괴로워서 비행기가 추락해 차라리 모두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해운시황은 형편없이 침체돼 우리 배를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세 번째로 오리다씨의 아들을 방문했다. 몇 번 만나는 사이 아들의 태도는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가만 보니 아들은 선가가 조금 비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선가를 5% 깎아서 다시 제시를 했다. 그랬더니 오리다 2세는 매매에 응했다. 한숨은 돌렸지만 생살을 도려내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오리다선박에 벤추라케미캐리호를 팔 수 있게 됐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한 달 이상 걸려 선박 매매에 따른 실무를 전부 마무리하고 정식 서명식을 갖게 됐는데, 여기서 오리다 2세가 다시 한번 거부의사를 밝히는 바람에 서명식 자체가 무산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오리다 2세는 용선주와 매매 당사자들이 다 모인 서명식 자리에서 “아버지가 가라고 해서 오긴 왔지만 나는 반대이다. 그러니 서명할 수 없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젊은 친구의 유아독존식 행동 때문에 서명식까지 깨진 마당이라 나는 호텔로 돌아와 방안에 틀어박혔다. 차라리 동해조선이 실패했을 때 진작 삶을 포기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동해조선 문제가 끝나니 또다시 이러한 고난이 이어지는가 하고 나의 모진 운명을 한탄했다. 나는 저녁도 굶은 채 위스키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밤 9시가 다 돼서 우리 회사의 이선덕 동경 주재원과 오리다 2세가 호텔방으로 나를 찾아왔다. 오리다 2세는 서명식을 무산시킨데 대해 정중히 사과를 하면서 “서명을 내일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벤추라케미캐리호의 매각은 1982년 2월에 완료됐고 회사는 부도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벤추라케미캐리호의 도입에서부터 매각에 이르기까지 우리 회사를 도와줬던 오리다씨는 지병이 도져 1982년 12월에 별세하고 말았다.

부도위기에 몰린 회사 종업원들이 살려내

앞서 얘기를 했지만 우리 회사는 1979년부터 1984년까지 5년 동안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이고 적자경영에 허덕였던 시기이다. 하지만 회계장부상에는 신기하게도 이러한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재무제표를 살펴보면 1980년과 1984년만 당기손익이 3억~4억원 적자를 냈을 뿐 정말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인 1981년에서 1983년까지는 모두 흑자를 기록한 것으로 나온다.

이처럼 실제로 실적이 악화됐는데도 흑자를 낸 것처럼 기록되는 이유는 선박을 처분했을 때 매각이익을 반영했거나 부외부채(簿外負債)를 숨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부외 부채는 곧 사채를 말한다. 사채는 전주(錢主)가 장부에 기록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에 부외부채가 되는 것이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종당에는 사채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재력이 약하고 빽도 없는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의 운명이다. 우리 회사도 이 어렵던 시기에 사채의 유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회사가 사채를 쓴 최초의 경험은 사실은 흔히 말하는 사채가 아니라 종업원들에게 빌려 쓴 돈이었다. 처음에 종업원들에게 돈을 빌린 그날은 내가 확실히 기억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쓰러진 다음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979년 10월 27일 토요일 아침 9시경 나는 부산에 출장 중이라 부산사무소로 출근했다. 아침 7시 뉴스로 박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터라 국가 안위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사장님, 오늘 막아야 할 어음이 1억원입니다. 그런데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약속했던 운임을 회수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대로라면 1억원이 수금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정국이 극심한 혼란에 빠지자 기업이든 은행이든, 사채 시장이든 돈을 움켜지고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태에 모두들 허둥지둥했다.

내가 만약에 서울에 있었더라면 은행 본점을 방문해 호소라도 해보면 어떤 방법이라도 나올 수가 있었겠지만, 부산에 출장 중이었으니 뭘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꼼짝없이 부도 위기에 몰린 나는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전 임직원들에게 호소하기로 결심했다. 서울 본사는 물론 부산, 여수, 울산 등지의 전국 지사의 모든 직원들에게 “비상상황이니까 비상자금을 동원 안할 수 없다. 직원들의 친척 돈이든, 집의 쌈짓돈이든, 꾸든지 빌리든지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동원해 달라”는 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다.

우리 직원들은 나의 호소에 적극 호응해 은행 문닫기 전 3시간 동안에 무려 1억 2000만원의 자금을 모았다. 자기 예금을 찾아온 사람, 집의 비상금을 내놓은 사람, 친척 돈까지 동원한 사람 등 미담의 주인공들이 곳곳에서 확인됐다. 직원들은 혼연일체가 돼 회사를 살리려고 발 벗고 나섰던 것이다. 나는 이 때 우리 직원들이 얼마나 애사심이 강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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